쉽게 의지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8월 26일의 악필 편지

by 낮별
01 (16).png


고등학교 때 뵈었던 기억에 남는 논술 선생님이 한 분 있습니다. 수업 때면 당신이 읽으셨던 책 이야기를 풀어 놓으시다가, 이따금 이런 말씀을 툭 던지곤 하셨죠. “근데 이 책이 참 좋은데, 4만원인가 해. 비싸지? 그니까 지금 부모님 돈으로 살 수 있을 때 사. 부모님 등골 빼먹을 수 있을 때 잘 빼먹는 것도 능력이야. 알았지?” 물론 선생님은 웃으면서 말씀하셨지만, 눈빛은 뜻밖에도 진지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씀은 단순히 ‘논술에 도움이 되니까 책 많이 읽어라’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청할 줄도 아는 것이 내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겠지요. 고등학생이면 4만원짜리 책을 사는 건 당연히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책을 사달라는 걸 마냥 싫어할 부모님이 있을까요? 보통은 오히려 더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뻔뻔해진다는 것은, 그래서 도움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은 관계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아버지를 원수처럼 미워했던 사람입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와 크게 싸우고 집을 뛰쳐나가 1년간 혼자 살기도 했지요. 그랬던 제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던 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였습니다. 제가 감당할 수 없었던 치료비를 아버지는 흔쾌히 내 주셨지요. 지금도 아버지와 저를 친근한 부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생신 때마다 조그만 선물 정도는 챙겨드리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도움을 청하는 것을 어렵게 느끼진 마세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는 일일 수도 있어요. 일말의 부채감도 없이 ‘뻔뻔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아요. 그 불편한 감정이 당신이 더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그 부채감이 삶의 목표가 될 수도 있겠지요. 당신을 살게 하고, 당신이 더 좋은 사람이 되게끔 이끌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이 용기를 가지시길 바라요. 자신의 상황과 한계를 명확히 알고,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도움을 구하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에요. 남들은 잘 하고 있다는 이유로 나의 고통과 한계를 무시해서는 안 돼요. 같은 짐을 들더라도 누군가에겐 가볍겠지만, 누군가에겐 죽을 힘을 다해도 들 수 없을만큼 무거울 수도 있어요. 그럴 때는 짐을 나눠 질 사람을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이에요.


덧붙입니다. 저도 어렵게 군 생활을 보냈습니다. 군대는 거친 조직이어서 적응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사람이 별다른 선택권 없이 입대를 하게 되지요. 여러 직업별 스트레스 통계에서 군인은 항상 최상위권에 위치하는 직업입니다.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길 바라요. 당신은 누구나 살면서 만나게 되는 거친 길을 군대에서 걷고 있을 뿐이니까요.


웹사이트 링크를 통해 편지를 보내 주세요. 답장으로 악필 편지를 매주 목요일 저녁 6시에 보내드려요.

keyword
이전 05화권태기를 고민하는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