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3일의 악필 편지
저도 양양이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키웠습니다. 떠나보낸 지 정말 오랜 시간이 흘렀지요. 어린 시절 저는 말주변이 없고 침울한 아이였습니다. 그런 제게 양양이는 언제나 저를 반겨주는 소중한 동생이었지요. 강아지를 키워 본 분이라면 누구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집 밖에서는 보잘것 없는 저를, 이 조그만 아이가 이토록 아낌없이 사랑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를요.
우울증이 심했던 군 시절, 제 관물함과 침대에도 양양이의 사진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감기에 걸렸을 때 양양이를 꼭 안고 자던 것이 그리워서 수통에 뜨거운 물을 담고 그 수통을 안고 잠들었던 기억도 있지요. 그렇지만 제가 말년 휴가를 나갔을 때, 양양이는 집에 없었습니다. 양양이는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잦던 아이였습니다. 동생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오래토록 가시가 되어 제 마음을 찔렀지요.
평생 빠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마음의 가시도 어느덧 빠지더군요.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저는 어머니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양양이가 죽었을 때, 다른 가족들은 반려견 장례를 맡기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바로 다음날 새벽, 가족들 몰래 양양이를 몰래 동네 뒷산에 묻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뜻밖이었지요. 양양이가 가장 따르던 것도, 양양이를 가장 아끼던 것도 아버지였으니까요.
아마 말년 휴가를 나갔을 때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저는 아버지에게 크게 화를 냈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충분히 지난 그 때는 그저 덤덤하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옛날 세대인 아버지는 강아지에게 장례씩이나 치뤄준다는 걸 납득할 수 없었구나… 그게 전부였습니다. 가족들의 뜻을 무시한 아버지의 행동은 분명 잘못되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건 아버지가 양양이를 아끼지 않아서, 양양이를 떠나보낸 것이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양양이를 보낸 이후 몇 번이나 강아지를 다시 들이자고 할 때마다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반대하셨거든요. 그건 아주 신중한 고심과 슬픔 끝에 나오는 반대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부턴가 새로운 강아지를 들이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방식으로 슬퍼하셨겠지요. 새벽녘 동네 뒷산에서 양양이를 묻으며, 아버지는 어쩌면 아버지의 눈물도 묻으셨을 지도요. 자식들에게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을 아버지의 눈물을, 양양이는 어쩌면 몇 번이고 핥아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우울에 지쳐 방구석에서 눈물을 흘리던 제게도 양양이가 그러했듯이요.
누군가 그리 말하더군요. 내가 강아지를 키운 것이 아니라, 강아지도 나를 키웠다고요. 말도 못하는 짐승이 우리의 무엇을 키워 줄 수 있었을까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그건 사랑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누군가의 존재 그 자체만을 반가워하고 따스하게 안아주는 방법이지요. 제가 양양이에게 배운 것을 당신도 분명히 당신의 동생에게서 배웠겠지요?
저는 지금은 당신이 충분히 슬퍼하시길 바라요. 시간이 충분히 지나면, 그 슬픔은 다른 옷을 입고 당신에게 돌아 올 거예요. 그건 소중한 누군가에게 나의 존재를 내어주는 요령일테지요. 얼굴을 핥아주지 않아도, 꼬리를 흔들지 않아도 우리는 잘 사랑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이미 깊은 사랑을 받아보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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