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일의 악필 편지
당신은 아픈 마음을 꾹꾹 담아 쓴 편지였겠지만, 편지를 읽고 저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도 대학생 때는 연애를 하면 이상하게 꼭 시험기간에만 크게 싸우거나 차였거든요. 그 땐 왜 세상이 다 무너지는 것 같았는지, 왜 하필 그 친구는 시험기간에 날 차서 공부도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지, 이런 일 때문에 멘탈이 박살이 나서 아무것도못 하는 나는 왜이리 한심한지… 돌이켜 보면 왠지 웃음이 납니다. 공부도 연애도 열심이었던 제가 새삼스레 기특하게 느껴져서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방학에 계절 학기를 등록했지요. 다행히 수업은 정말 마음에 들었고, 저는 꽤 착실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시험 대체 과제로 레포트를 작성하면서였습니다. 현장 답사를 다녀온 후 레포트를 쓰는 것이었는데, 답사도 즐거운 마음으로 다녀왔습니다. 출결도 과제도 잘 해냈었고, 보고서만 잘 쓰면 충분히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레포트가 써지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왜인지 모르겠지만,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종일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펼쳐놓고 서론 몇 문장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나중에는 그마저도 지쳐서 커서가 깜빡거리는 걸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지요. 결국 카페 마감 시간까지 꾸물거리다 자리를 떴지요. 집에 오는 길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항우울제를 오래 끊었더니 다시 우울증이 올라오는 게 분명하다고, 나는 지금 과제를 할 수 없는 상태라고요.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 하고 있는데 우울증이 자꾸만 제 발목을 잡았습니다. 열심히 준비한 만큼 성과를 보고 싶은데 지금의 난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돌덩이처럼 저를 짓눌렀지요. 그 날 새벽, 교수님께 메일로 과제 대신 긴 분량의 메일을 보냈습니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후 우울증이 재발한 것 같다고, 그런데 이 과제는 꼭 완성하고 싶다고, 그러니 감점을 주시더라도 달게 받겠으니 조금 늦게 제출해도 괜찮겠느냐고요.
어쩌면 과제보다 더 힘든 편지를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마음의 문제로 타인에게 양해를 구한 건 난생 처음이었으니까요. 교수님의 답장 또한 길었습니다. 교수님은 감점을 받고 지각제출을 허락해주셨지요. 그리고 그 뒤에 긴 위로를 덧붙이셨습니다. 교수님의 배려에도 저는 결국 미완성한 레포트를 제출하게 되었고, 낮은 학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도 이따금 그 교수님의 답장을 꺼내 읽어보곤 합니다. 대개는 그 때처럼 제 마음이 제 발목을 붙잡는 순간들이지요.
조금만 시야를 멀리 본다면 성적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했는가, 그리고 무엇을 배웠는가겠지요. 교수님의 편지를 통해 최선을 다할 때 세상은 그 노력을 조금 더 따스한 눈길로 바라본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라 생각했던 나의 마음의 문제에서도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원하는 결과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훌륭한 결과였습니다.
장 좋은 것은 마음을 다치고 나서 그 마음을 감싸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 건강을 챙겨야 한다는 말은 마음의 건강에도 통용됩니다. 예기치 못한 불운에도 흔들리지 않고, 다쳐도 금방 회복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지요. 그리고 이 또한 몸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부단한 수고가 필요합니다.
저는 당신이 지금 앞에 펼쳐둔 전공책 한 줄을 읽는 데 최선을 다하길 바라요. 그 한 줄을 읽기 위해 밤을 꼬박 세워야 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하루종일 딴짓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야 겨우 읽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 또한 당신의 최선이니까요. 그리고 오늘 당신의 최선은, 내일 당신의 마음이 조금 더 단단히 여물게 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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