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일의 악필 편지
편지에서 가장 짙게 느껴지는 것은 자괴감이었습니다. 때로는 피곤할 수도 있지요. 우울하고 무기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감정의 파도는 언제고 우리를 덮쳐오기 마련이고, 다시 물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자괴감을 주는 것은 당신이 사실 그 파도에 머무르기를 원한다는 것 같아요. 이런 무기력과 나태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그러고 싶지는 않은, 솔직히는 침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좋은 마음이겠지요.
그런 자괴감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게으름조차도 최선일 수 있습니다. 그 게으름을 못마땅해하는 당신의 마음도 당신의 최선이겠지요. 그리고 최선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품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게으름을 피우는 당신의 몸은 당신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 될 수는 없습니다. 피곤을 느끼는 것도, 그 피곤에 지쳐 누운 침대에서의 안도감도,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느끼는 못마땅함도 잘못이 될 수는 없지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낄지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입니다. 우리의 무의식은 감정이라는 언어를 통해 언제나 치열하게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무의식은 무기력을 언어 삼아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건 우리가 스스로 삶을 돌아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무기력이 무의미에서 온다고 이야기합니다.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낄 때 사람은 무기력을 느낀다는 것이지요. 저 또한 그랬습니다. 저는 제 노력으로 무언가 이뤄낸 것이 오래 되었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그걸 깨달은 건 대학 신입생 시절이니 10여년이 지난 일이지요.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제 힘으로 무언가 해낸 것이 없다는 느낌은 오래토록 저를 잠식했습니다. 그건 재수를 해서 성적을 올렸는데도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 경험에서 비롯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덕분에 아무리 노력해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패배감에 오래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는 노력을 하고 싶어도 노력하는 것 자체가 버겁게 느껴졌지요.
저의 20대가 무기력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글쓰기와, 글쓰기를 매개로 사람을 만나는 건 재밌었으니까요. 제가 무기력하지 않은 때는 대개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해야 할 공부는 다 내팽개치고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났으니 생산적이진 않았습니다. 오래 글을 쓰고도 책 한 권 내지 못했으니 굉장히 열정적이었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긴 시간을 곱씹고 나서야 저는 그 나날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문장이 사람의 마음에 닿는 것을 경험하는 나날들이었다고요. 그리고 나서 저는 상담과 문학치료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무기력이 제게 그러했듯, 당신의 무기력은 당신에게도 질문을 던지고 있을 겁니다. 당신은 어떤 의미를 잃었나요? 그 의미를 되찾기 위해, 당신은 그 무기력에 잠겨 무엇을 하고 있나요? 답이 쉽게 나오는 질문은 아닐 겁니다. 저 또한 그랬고, 지금 찾은 답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게 완전한 정답이었다면 지금도 제가 무기력해지진 않겠지요. 저는 자주 무기력의 밀물에 잠깁니다. 과거에 비해 발전이 있다면, 그 밀물을 맞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무기력을 맞는 과정마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의, 아니, 우리의 무기력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추동하는 잠재력의 마중물이지요. 무기력이 밀려올 때, 우리는 비로소 의미를 탐색할 수 있습니다. 무기력하지 않을 때는 달리기에 숨이 가빠 돌아볼 수 없었던 삶의 의미들이지요. 그러니, 지금은 그 무기력에 충분히 머무르시기를 바라요. 썰물은 언제고 돌아오기 마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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