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by 낮별

자는 건 좋지만 너무 긴 잠은 두려워

벼락같이 떠진 눈은

충분히 잤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 자기 무서워서일까

흙두덩 깊이 파묻힌 나는

축축한 어둠이 포근한걸

두터운 껍데기 속에

안겨있고 싶은걸


그런데

자라기 싫은 키가 자꾸 자라

나는 나를 밀어내고

푹 젖은 껍데기는 요란하게 찢어져

이불같던 흙이

이제는 발치를 겨우 덮을 때

꼭 눈을 떠야만 할까

눈꺼풀을 찌르는 빛조차

내겐 너무 밝아

여전히 봄은 무섭기만 한데


그러나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것들,

서툴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어

찬 공기는 꽤 괜찮다는 것을

무언가 썩어가는 냄새도

꽤 괜찮을 수 있다는 것을

ㅡ그리고 말은 말일 때보다

함께 있음일 때

더욱 예리하단다

그러니,

그러니 눈을 떠 보렴


껍데기를 눌러 쓴 채로

나는 내려다본다

발치를 덮은 흙과

죽은 벌레들의 사지를

그리고

메마른 껍데기를 뒤집어 쓴 떡잎들을


많은 삶이 여기 살고

많은 삶이 여기 죽어

나만 봄이 두려운 건 아니구나

햇빛과 바람과 흙과 비와

삭은 풀잎과 뿌리를 갉아먹는 벌레와

여기서 나고 죽은 모든 것들과

여기서 살아갈 모든 것들은

본능대로 봄을 두려워하니

그래서, 모든 싹들은

함께 있기 위해

봄비가 지나고 일제히 잎을 틔운다


꽃망울은 제각각 올리더라도

우리는 뿌리를 얽을 수 있으니

작은 씨앗아,

이제 너도 사랑해보겠니

너의 꽃을 피우며

누군가의 피움을 지켜보겠니


*


시 한 편으로 봄 인사를 갈음합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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