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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 노을 Aug 08. 2022

얼간이란 무엇인가?

〈세 얼간이〉를 봤다. 그것을 보면서 받았던 감동은,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눈이라는 기관이 영화를 향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받은 것의 뱉음인 것인가. 

     

영화는 얼간이에 대해 말한다.      

누가 얼간이인가? 


란초를 비롯한 세 명의 친구, 그들이 얼간이인가?      

우리는 얼간이에 대해 정의해야 한다.     

얼간이는 누구인가?     

전통적 규칙, 관습, 구시대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니체는 원한에 빠진 자들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원한이란, 약함을 선함으로 받아들이는 도덕적 정신 착란 증세를 일컫는다. 

도덕은 사회가 개인에게 말하는 약속이다. 이 약속은 깨기-위함을 표방하지 않는다. 이 약속은 지켜야-함을 표방한다. 의무와 당위는 가능성과 개연성이 되고, 그것은 필연성이 된다. 사회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이 되고, 만물이 법칙이 된다. 그리고, 만물의 미천한 신체에 각인된 법칙은 유전의 법칙에 따라, 재생산된다. 그렇게 사회는 괴물이 되어, 그 구성원인 인간에게 알을 낳게 한다. 봉준호의 <괴물>이 그러하듯이.     

얼간이는 괴물의 알을 낳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그들이 괴물의 알을 깨뜨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뻐꾸기가 아니니까. 그들은 살생으로 생을 시작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문으로 생을 시작한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All is well’이라는 주문 말이다.      


그 주문은 운명론적이라기보다 결정론적이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다.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 관계로서의 종합인 세상사를 믿는 것이다.      

그 주문이 인간 잘-됨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얼간이의 생각은, 모든 사람이 얼간이가 되도록 한다.      

그것이 얼간이의 마술이자, 폐하에 대한 경배이다.      


영화는 부의 축적이 성공이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10년 전, 공대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바라본 관객들은 성공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좋은 직장은 성공인가? 돈이 많은 것은 성공인가? 만점을 받는 것은 성공인가? 연설을 잘하는 것은 성공인가? 

끊임없는 질문에 대한 답은 란초가 해준다. 그는 말한다. 열정을 쫓는 것. 그것의 부산물이 성공이라고. 


열정을 뜻하는 영단어, passion은 라틴어 pati에서 비롯되었다. 그 뜻은 고통을 겪는 것, 참는 것이다. 즉, passion의 본질에는 '고통'이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라이프니츠에 반한 수사학적 표현으로 '이 세상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세계'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관점에서, 삶은 고통이다. 


열정은 삶이라는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다. 열정이 없는 자는 죽은 것이요, 열정은 산 자의 징표이라.


열정을 쫓는 것은 삶을 쫓는 것이다. 삶은 살아가는 것을 초월한다. 


나다운 삶. 그것은 동어반복이다. 삶은 나다운 것이다. 나답지 않은 것은 삶이 아니다. 

삶은, 주체를 필요로 한다. 그 주체는 객체를 자신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필연적 유아론 아래 있다.

그것을 벗어나면서, 주체는 객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객체가 주체를 압도한다면, 그것 역시 삶이다. 주체의 주체다움이 객체에 의한 압도인 것이다. 

단, 그 억압은 '선택'을 필요로 한다.

선택하지 않은 삶, 그것은 결코 나다운 것일 수 없다.


자유롭지 못할 자유는 존재한다.

단, 그 자유 역시 선택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열정을 쫓으려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성공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wish과 want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want가 단순히 원하는 것이라면, wish는 다른 사람에 의해 소망하도록 길들여진 것이다. 


니체는 서양의 노예도덕이 초인을 길러내지 않고, 길들였다고 말한다. 


길러냄과 길들임, 그것을 구별하는 것은 주체의 유무이다. 


길러내는 것은 주체를 형성한다.

길들이는 것은 주체를 제거한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길러냄의 산물인가, 길들임의 그것인가? 

그에 대한 답은 길러냄의 산물인가, 길들임의 그것인가?

무한소급으로 귀결될 것 같은 질문은, 두 가지 상황 앞에서 사라진다.


전쟁과 사랑이 그것이다.


전쟁은 주체의 소멸을 야기한다. 전쟁에는 객체만이 존재한다. 주체는 사라진다.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전쟁을 원한 사람은 전쟁을 원하도록 길들여진 것이다. 

그의 내면은 그의 외면의 역함수이다. 외피라는 교점 하나만을 공유하는 역함수 말이다. 


사랑은 객체의 소멸을 야기한다. 사랑에는 주체만이 존재한다. 객체는 사라진다. 

모두가 사랑을 원한다. 사랑 안에서 객체는 주체가 된다. 나는 보이는 존재가 아니다. 보는 존재다. 

내가 보고 있는 사람 역시 나를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현실은 초현실이 되고, 환상이 되고, 꿈이 된다. 사랑은 둘을 하나로 만든다. 그 하나는 중점이 아닌다. 둘인 동시에 하나인 존재인 양자의 상태이다. 양자의 확률적 분포, 사랑은 그 확률적 분포가 확실하다고 말한다. 둘인 동시에 하나라는 필연, 그리고 그 운동의 필연, 그것이 사랑이다. 


얼간이는 누구인가? 

세 얼간이는 표면적으로 친구 세 명을 의미한다. 

하지만, 표면을 뛰어넘자. 

세 얼간이는 누구인가? 

가식, 근심, 그리고 편견이다. 

자신을 감추는 삶, 

자신을 미루는 삶,

자신을 피하는 삶,

얼간이는 그런 생을 사는 존재들이다.

그 껍질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프락사스라는 경구를 읊는 것 이상이 요구된다.

죽음 직전의 삶, 혹은 5년 간의 감춤,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사는 것. 


하지만, 그것을 벗어난 자는 '자유' 앞에 선다.

그 자유는 freedom이자 liberty이다. 


무지한 자를 얼간이라고 한다.

하지만, 무지의 지는, 그 자체로 지이다. 

그것을 뛰어넘는 감동의 지는 실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얼간이는 무엇인가?

그 답은 활자화할 수 없다. 

그 답은 내면화해야 한다. 


당신의 생각, 그것이 답이다. 

이것은 열림으로 결말을 닫으려는 닫힌 결말이다.

닫힌 결말의 엔딩은 'happy ending'이다.

얼간이에 대한 답, 그것의 귀결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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