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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 노을 Jun 01. 2022

발-냄새란 무엇인가?

 니체의 <아침노을>은 새로운 사상, 도덕을 앞세워 기존의 학문적 체계를 180도 바꿨다. 아침의 노을은 새로운 무언가를 꿈꾸게 하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짱구는 못 말려 극장판-)어른제국의 역습>은 저녁노을을 주장한다. 저녁의 노을. 아침의 노을은 일찍 일어난 자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 저녁의 노을은 오늘의 고달픔을 위로받고자 하는 자에 의한, 지난날의 추억이다. 아침노을이 새로움을 지향한다면, 저녁의 노을은 반동적인 힘, 즉 과거로의 회귀를 지향한다. 이때의 과거는 실제의 과거라기보다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관념 속의 과거이다. 마치,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고향을 찾으려는 현대문학의 고군분투.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현대문학이 서정 혹 서사적 표현에 집중하는 시각-중심적이라면, 저녁의 노을은 후각-중심적이라는 것이다.      

 후각은 다른 감각에 비해 압도적인 적응력을 지닌다. 불쾌한 냄새도 적응되면, 공기와 다르지 않게 맡는 착후(錯嗅)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적응의 이면에는, 결코 적응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적응이 야기하는 피로감이 있다. 그 피로감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무언가이다.     

 <피로사회>는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자기파멸(한병철, 2012)을 말한다. 할 수 없다가 아닌, 할 수 있다가 만들어낸 피로사회, 이는 21세기의 냄새이다. 불필요한 것들의 과잉으로 가득한, 피로의 냄새, 긍정성의 냄새, 가능성의 냄새, 그 모든 것들은 윤리의 도덕화로 인해 발생한다. 자신의 가치판단을 배제한 채, 사회에게 그것을 오롯이 맡기는 윤리의 도덕화, 이는 개인이 뭐든지 할 수 있게 만든다. 

 <어른제국의 역습>도 윤리의 도덕화를 말한다. 하지만, 21세기 현대사회의 그것은 20세기의 그것과 다르다. 21세기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초점을 둔다면, 20세기는 했었던 것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아닌 확실성. 이는 반동적인 운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어제 했던 대로 오늘을 사는 사람의 순간순간은 안도감으로 가득할 것이다. 문제를 문제라고 부를 때, 문제는 문제가 된다. 안도감을 체념이라고 부르지만 않는다면, 안도감은 영원한 안도감일 뿐이다.    

 <어른제국의 역습>에서 안도감은 20세기의 냄새로 명명된다. 21세기의 냄새는 불안함일 것이다. 그러다, 20세기와 21세기의 냄새 각각의 대립만을 생각한다. 이율배반에 빠져 주요한 한 가지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발-냄새이다. 발-냄새란 무엇인가?

 제2의 심장인 발. 그 발에서 나는 냄새라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냄새이다. 냄새가 자신을 말한다? 이는 <기생충>이 말하는 부와 빈의 냄새와 상통한다.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기생충>이 강자의 냄새-사용을 보인다면, <어른제국의 역습>이 약자(짱구 가족)의 냄새-사용을 보였다는 것. 

 발-냄새가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그 정도의 고약함은 결국 삶의 고단함을 의미할 것이다. 가장의 발-냄새, 가장의 삶의 고단함, 20세기와 21세기 어느 시대에도 어른의 고단함은 존재했다. 그 고단함은 미래를 기원하는 의식의 제물이다. 자신을 있게 한 과거의 고단함, 이는 자신이 해야 할 현재의 고단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과거로의 회귀, 그 과거가 영원하지 않다면, 결국 이중의 고단함-전이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어른제국’은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지 못한다.      


꼬마야, 네 미래를 돌려주마...     


미래를 돌려주는 어른제국의 파멸, 이는 과거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 없다는 깨달음의 고백이다.      


과거에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과거에는 존재할 수 없다. 과거를 회상하는 현재 속에서만 과거는 존재할 뿐이다. 그곳에 존재하던 것들은 현재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과거는 무언가를 포함할 수 없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과거를 추억하는 현재, 미래를 바라보는 현재, 우리는 현재에만 살뿐이다.      

<어른제국의 역습>이 말하고자 한 바는 과거와 미래의 변증법으로써의 진테제, 현재이다.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는 이런 시구를 남겼다.     


“Carpe diem, quam minumum credula postero (현재를 잡아라, 내일이란 말을 최소한만 믿어라.)”     


현재를 잡는, 움켜쥐는, 쟁취하는 짱구의 모습, 그로 인해 미래가 올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아닌, 미래를 끝내 돌려받는 그 모습, 그것이 <어른제국의 역습>을 본 자가 갖춰야 할 태도일 것이다.      


당신은 현재를 움켜쥐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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