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는 공간의 이동을 전제로 한다. 일상에서의 휴식은 휴가가 될 수 없다. 최소한, 정신적 공간의 이동이라도 존재하여야 우리는 휴가를 간 문화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공간에서 쉼을 행위하는 것은, 사실 행동의 영역이다. 무의식적으로 이곳에 가겠다는 내적 관념의 외적 발현. 부르디외식으로 말하면, 하비투스일 것이다. 하비투스에 따라, 대한민국 대다수의 사람은 제주도로 향한다. 제주도는 목적이나 목표라기보다는 하나의 공간이다. 목적과 목표는 도착과 동시에 그 내재적 결핍이 충족된다. 반면, 공간은 배경으로 존재하는바, 어떤 주요성보다도 수단과 잉여의 집합으로 존재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제주도에서 무엇을 하는 것보다도 제주도에 있다는 것, 즉 행동이 아닌 존재이다. do가 아닌, be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휴가이자, 제주도의 완전성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제주도에는 다양한 놀거리, 먹거리, 볼거리... 감각을 전제로 하는 행위를 촉발하는 요소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하지만, 감각보다 중요한 것은 감각을 일으키고자 하는 동기의 방향성, 즉 행복이다. 행복이 무엇인지는 대단한 논쟁거리이다. 감각의 영역을 넘어서 이성의 영역에 존재했다가, 이제는 감각과 이성을 가로질러 인간 신체에 침전되어 있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로 자리매김하는 듯한...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모든 요소를 합쳐놓은 제개념이자 본질개념의 위치에 있는 그것. 행복은 정의내릴 수 없다고 정의내려야 한다. 그 행복이 휴가의 목표이다. 목표를 달성하는 데 행위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존재함이다. 이때의 존재함은 무엇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어디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의 주체성이나 실존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존재의 공간성이라는 부수적 요소에 집중하는 이유는, 배경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배경은 시공간적 개념이다. 시공간은 휨을 만들어낼 수 있다. 휨은, 왜곡으로 해석될 수 있다. 왜곡은 흔히 나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를 변형하여 실제의 수용자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우리는 실제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 과연 그런가? 현실과 꿈 중 긍정성의 과잉은 어디서 도출되는가? 맨눈의 세상과 알코올이 만들어낸 환상적 세상 중 무엇이 아름다운가? 이상세계나 이상형, 이상국가와 이상적 자아... 이상을 꿈꾸는 우리는 현실을 긍정하는가? 우리는 현재에 존재할 수 없다. 우리에게 보이는 사물들은 모두 시차를 지닌다. 빛이 물체에 반사되어 우리 눈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물체였던 것을 본다. 마치, 밤하늘의 별빛이 죽은 별의 시차적 구조요청이듯. 과거에 사는 우리는, 현재를 산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현재에 산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항상 미래를 꿈꾼다. 우리는 '겠'을 사용하여, 미래를 형성한다. 그 미래를 형성하는 것은 꿈이라는 자본의 작용으로 가능한다. 그렇게 우리는 수신인이 부재하는 편지를 갈망하며 매일을 살아간다.
휴가는 현재의 삶을 가능케 한다. 휴가지에서 우리는 감각에 의존해선 안 된다. 우리는 경험에 의존해선 안 된다. 우리는 배경에 의존해야 한다. 현재가 존재하려면, 빛과 같은 외부 요소에 의존해선 안 된다. 배경은 내면에 존재한다. 배경으로서의 제주도는 물리적 공간 혹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내면에 존재한다. 내면적 공간으로서의 제주도는 현재에 존재한다. 그곳에 발을 디디면서, 우리는 이걸 해야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게 좋다고 말한다. 현재형 통사는 현재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자기암시적 구조이다. 그 구조는 믿으면 이뤄진다는 기적적 매커니즘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관념은 믿음으로써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것을 사이비 내지 허구로 보는 것은 인간 외면만을 인정하는, 일종의 좀비적 실천이다.
휴가지는 그 자체로 휴가지이다. 휴가지는 그 자체로 현재이다. 현재를 잡는 것이 아닌, 현재로서 존재하는 것. 휴가지에서 우리는 현재의 미학을 느낄 수 있다. 과거의 것으로 미래를 생각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현재의 것에서 현재를 즐기며, 현재를 살아가는... 휴가지에서의 삶. n박 n+1(2)일은 우리에게 해방감을 선사한다. 해방감은 자유의 충만함과 즉각성을 모두 허락한다. 해방감의 전제는 구속과 압박이다. 해방은 하는 것이 아닌, 되는 것이다. 해방되는 일상은 감옥에서 나와 휴가가 된다. 그리고 휴가가 끝난 후, 우리는 감옥에서 다음을 기약한다. 다시 한 번 미래를 기약하는, 또다시 미래를 기약하는, 시시포스적 일상은 해방과 구속 사이의 시계추이다. 해방을 허락하는 것은, CEO도 자신도 아니다. 그것은 믿음이다. 휴가가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가능한 휴가, 그 일례이자 일반화로서의 제주도 휴가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현재는 아름다우니까 말이다. 여기서의 아름다움은 믿음에서 기인할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믿어야 한다. 무엇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