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유로운가?
인간은 자유를 찾아 떠도는가?
만약, 그런 당신이 방-탈출을 즐긴다면, 이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억압과 감금, 동시에 자발적인 입장.
이것은 억압받을 자유인가? 자유로부터의 억압인가?
보드게임이 그러하듯, 방-탈출은 역-사회계약을 보여준다.
현실에서 가상으로 넘어가는 방-탈출 참가자들의 자유-반납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헷갈리게 한다.
과학과 계몽, 민주정치와 시장경제, 개인의 혁명을 겪으면서 인간은 불안해졌다.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의 이행은 정체성의 부재를 느끼게 한다. 전통이 떠먹여 준 정체성의 부패와 새벽에 구매하지 않으면 상하는 변검(變臉)의 정체성. 유통기한이 지난 정체성만 팔고 있는 상점과 그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소비자, 이를 지켜보는 사회의 음흉한 눈빛은 암울과 냉소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방-탈출은 개인의 자발적 억압 추구이다. 개인은 스스로 눈을 감고, 방에 입장한다. 개인은 짜인 각본에 따라 문제를 풀어나간다. 탈출이라는 목표를 향하는 개인이 보이는 시간과의 사투. 그리고 탈출을 웃으며 보고 있는 억압자의 모습. 개인은 탈출 여부와 관계없이 돈을 낸다. 잘 감금되었다고 말하는 개인의 말은 기이하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콜라주는, 구토보다 욕망을 야기한다.
속물은 무엇인가?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자에게 붙이는 자본주의의 영광스러운 칭호. 그것이 속물이다. 이제 우리는 물질적 욕망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목표를 욕망한다. 정주행이라는 목표는 OTT 드라마의 성공 요인이다. 하루도 안 되어 완결을 완성하는 집념과 끈기의 아무개는 목표를 성취했다. 놀이공원은 자발적 살인미수이다. 스스로가 위협적 상황에 들어가도록 하는 그 모습은, 살아서 나가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기 위한 개인의 그것이다.
머튼은 사회적 목표와 제도적 수단 사이의 괴리가 선을 넘을 경우, 아노미 상태가 도래한다고 봤다.
사회란 무엇인가? 개인은 사회를 이룰 수 없는가? 개인이 세운 사회는 자신이 절대군주이자, 철인이며, 독재자이자, 사회운동가이다. 그곳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은 무엇인가? 단 하나의 단어로 함축된다. 돈 말이다. 돈이 없는 개인은 아노미에 빠진다. 무규범의 전제는 규범이다. 규범은 무엇인가? 지켜야 하는 것인가? 무엇을 지킨단 말인가? 자신의 목숨? 자신의 명예? 그것보다 먼저인 것은 정체성이다.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개인의 고군분투. 그것을 지키지 못한 자는 무규범 상태에 빠진다. 쓸모없다는 수식어는 아노미에 빠졌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쓸모를 찾는다. ‘뭐’라도 하기 위해서...
‘뭐’는 무엇인가? 목표이다.
인간은 동물이면서 인간이다. 인간의 동물성은 먹이를 찾으려는 데서 보인다. 목표라는 먹이를 찾으려는 인간의 동물적 본능은, 정글을 만들어낸다. 이 정글의 목표는 불균형이다.
불균형은 이롭다. 과잉은 아름답다. 그 과잉을 목표로 하는 정글-사회는 인품보다 물품을 선호한다. 마스크는 표정을 가렸다. 애초에 표정이 있었는가?
목표는 무엇인가? 단기적인 도착지점이다. 마라토너에게 있어서 42.195km를 달린 뒤의 결승지점이 목표이다. 목적은 무엇인가?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우리 삶은 목적이 없다. 무목적의 삶. 이는 자연과학의 성과이다. 인간은 자연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한 존재인가?
목적 없음은 인간 없음을 의미한다.
거리의 온갖 방-탈출 간판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다.
거울 속 당신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