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에 대한 존경
오전 5시 반
침낭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온 나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일찍 출발한 이유는 알베르게(호스텔)에 침대가 없을 수 있다는 다른 순례자들의 조언 때문이었다.
비가 내리는 새벽
달이 보이지 않는 새벽
오로지 휴대폰 플래시에 의지하며 길을 걸었다.
산티아고까지의 길을 나타내는 이정표를 따라 걸어야 했지만, 우거진 수풀 사이에 가려진 이정표를 놓치고 말았다. 나는 급하게 구글맵을 켜, 다음 마을까지의 길안내를 요청했다. 하지만 구글맵은 순례자의 길 루트가 아닌 자동차 최단거리 루트를 알려주었다. 돌고 돌아 이정표를 찾을 수 있었고, 올바른 길로 걷기 시작했다.
또다시 길을 잃을 수 있다는 초조함은 아침햇살에 녹아 사라졌다. 그러자 주변 경치가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 초장은 나의 마음에 안식을 줬으며, 미세먼지 하나 없이 맑은 공기는 한국에서 스트레스로 피폐해진 나의 몸과 마음을 씻겨주었다.
3시간 넘게 걷다 보니 배가 고팠다.
때마침 마을이 하나 나와, 비도 피하고 아침도 먹을 겸 바에 들어갔다.
메뉴판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매장 주인분에게 추천을 받아 커피와 음식을 주문했다.
주인장이 추천한 음식은 스페니쉬 오믈렛이었다.
달걀의 부드러움, 감자의 고소함. 커피의 쓴맛과 너무 잘 어울렸다.
거센 비를 뚫고 식당을 떠나 걷다 보니 어느새 비가 그쳤고, 곧 수비리에 도착했다.
마을은 작고 아름다웠다. 나는 혹시 남는 침대가 없을까봐 곧장 공립 알베르게로 향했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알베르게 오픈시간은 12시였기 때문이다.
알베르게 앞에 식수대가 있어 물을 마신 뒤 12시까지 계단에 앉아서 기다렸다. 내가 첫 손님이었다. 수비리 공립 알베르게는 17시쯤 만원이 됐다. 성수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유로웠던 것 같다.
프런트 데스크에 인스타 계정이 적혀있었다. 미술을 전공하는 알바생의 인스타였다.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틈틈이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다.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돌아올 때까지 같은 자리에서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에 감탄했다.
나는 언제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을까?
지나온 삶을 되돌어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