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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경 Oct 22. 2023

아무도 모르는 이름

  가끔 새로운 인터넷사이트에 가입한다. 그때 비밀번호 분실 시 본인확인 하는 몇 가지 방법이 제시된다. ‘가장 친한 친구 이름’을 선택하고 이름을 써넣는다. “허윤옥” 나는 그를 옥이라 부른다.


  그때 우린 일곱 살이었다. 이른 나이로 영광국민학교에 입학한 우린 두세 살 많은 반 친구들이 보기엔 코흘리개 동생뻘이었다. 그래서 우린 늘 둘이 놀았다. 


  학교가 끝나면 같이 우리 집으로 갔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숙제하고, 함께 놀았다. 옥이는 인형처럼 귀여운 아이였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예뻐했다. 더구나 그 애의 어머니가 삯바느질하며 홀로 딸을 키운다는 사실을 알고 난 할머니는 한 번이라도 더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 했다. 옥이 어머니도 옥이보다 나를 먼저 챙겨주었다. 그때 우린 내 것, 네 것이란 말을 모르는 아이들 같았다. 얼마나 붙어 다녔던지 그리 닮은 구석도 없는 우릴 쌍둥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1학년 1학기를 보냈다. 몽땅 헤아려도 150일 남짓이었다.


  아버지가 200리나 멀리 떨어진 목포로 전근되신 것은 여름방학 때였다. 방학이었으니 당분간 날마다 보지 못하는 것과 이사하면 다시 못 본다는 것도 구별할 줄 모르던 철부지. 우린 그렇게 헤어졌다. 이사차는 아침 일찍 떠났다. 떠나는 트럭 앞자리에 앉아서 자꾸만 뒤돌아보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돌아봐야 하는 줄 그땐 몰랐다.


  가끔 꿈을 꾸었다. 함께 놀던 작은 개울이 꿈속에서는 커다란 강이었다. 일곱 살 꼬마는 앞 개울과 강을 구분할 줄도 몰랐고 작은 개울이 강인 줄 알았다. 그 강은 내 안에서 점점 넓고 깊어졌다. 그런 마음을 그리움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아버렸지만 난 너무 작은 꼬맹이였고, 200여 리 길은 너무 아득했다. 2학년 국어 시간에 그리운 내 친구라는 동시를 썼을 때 “쬐끄만 게 그리움이 뭔지 알기나 하느냐”는 말에 나의 그리움은 입을 잃어버렸다.


  옥이가 아주 많이 보고 싶었다. 방이 여러 개였던 커다란 우리 집과 방이 하나였던 옥이네 집이 자꾸만 떠올랐다. 늘 재봉틀 앞에서 바느질하시던 옥이 어머니의 모습도 생각났다. 가끔 허름한 옷을 입은 내 또래 여자애를 보면 불현듯 옥이가 생각났던 것은 옥이네 작은 집과 재봉틀 앞에서 보았던 옥이 어머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단발머리 여학생이 되어가면서 그 아이의 얼굴은 점점 희미해지고 마침내 그 눈빛마저 생각나지 않게 되었는데 그 이름만은 더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교실 유리창을 호호 불어 ‘HYO’라고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 남자가 누구냐고 짓궂게 묻는 친구도 있었다. 그래도 굳이 일곱 살 때 헤어진 친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의 소녀 시절은 실연의 나날이었다. 나와 친했던 친구 몇은 허망한 내 실연의 실상을 알았다. 더러는 웃었고 몇몇은 이해는 해주었지만 동의하지는 않았다. 쓸데없이 감정 낭비라고 일갈하는 친구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들의 눈에 난 한 명 오타쿠였을지도 모른다.


  당시 학생들의 문예지였던 “학원”에 옥이를 찾는 글을 띄운 적이 있었다. 답장은 문학동아리 친구에게서 왔다. 옥은 내 마음속에만 있다가 내 마음속으로 사라졌다고 아주 점잖게 나무랐다. 그러나 그때의 난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모든 일이 그리움이라는 색을 입었다. 그리고 나는 그 그리움을 벗을 생각이 없었다. 아니, 이미 피부가 되어 벗을 수도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내 안의 옥이는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빗줄기를 따라 내 마음을 두드렸고, 창밖에 떨어지는 갈잎 하나로 나를 흔들었다. 내 안에 오롯이 살아있는 비밀한 노래였고, 비밀한 몸짓이었다.


  정말, 정말 우연이었다, 옥이의 이모를 만난 것은. 연수를 온 교사들 중 영광 분들이 있었다. 영광이라는 지명에 끌려 내 안의 옥이가 튀어나왔다. 일곱 살 때, 그것도 고작 한 학기 같이 다닌 친구를 서른이 되도록 잊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에겐 얼마나 바보 같은 이야기였을까. 그런데 그중 나이 많은 여선생님 한 분이 자기 조카 이름이 허윤옥이라고 했다. 나이도 나와 비슷하고, 어려서 살던 곳도 영광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삯바느질하셨다는 대목에서 우린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날 밤, 난 20년도 더 지난 시간으로 마구 달려갔다. 신 내린 듯 써 내려간 편지가 자그마치 12장이었다.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그녀가 있다는 광주로 금방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70년대는 목포 광주가 그렇게 금방 오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답장을 기다리는 며칠은 불에 덴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옥이의 반가운 비명이 쏟아지는 편지가 올 것 같았다. 그렇게 일주일, 열흘, …. 기다림이 불안으로 까무룩 해졌을 때 소식이 왔다. 엽서였다. 


  “누구신가요? 어디서 만난 사람인지 생각이 나지 않아요.”


  내가 보낸 12장의 편지에 스무 자 남짓한 엽서. 20년이 넘는 시간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내 안에서 통곡하는 작은 소녀가 있었다. 트럭을 타고 자꾸만 뒤돌아보며 나타나지 않는 짝꿍을 찾던 일곱 살 소녀는 뒤돌아보는 것은 처음부터 혼자 몫이었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그 후 옥이를 만났다. 한 번은 꼭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잊은 줄 알았던 어렸을 때 얼굴이 어렴풋이 생각날 만큼 예뻤다. 그는 친절했지만 생전 처음 만난 사람처럼 어색했다. 언제든 만나면 금방이라도 끌어안고 울 것 같던 나도 데면데면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멈칫거리며 말했다.


  “난 기억이 안 나는데 우리 어머니는 기억하고 계셔요. 미안해요.”


  다음에 또 만나자는 말을 들으며 내 안에서 이름 하나가 소리도 없이 바스러졌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리워하던 옥이와 실재의 옥이는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찾아 나섰으면 찾을 수도 있었을 그 긴 세월을 그리워만 했던 것도 내 안의 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도.

     

  돌아보면 함께 지냈던 150날의 150배도 넘는 날들이 지났다. 난 옥이의 소식을 모른다. 이제는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지금도 가장 친한 친구 이름에 허윤옥이란 이름을 쓴다.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이름, 일곱 살 소녀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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