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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경 Oct 23. 2023

그들의 거리

  동글동글 예쁜 호박을 샀다. 가을 햇살이 따갑지만 그늘막도 없이 길가에 주섬주섬 펼쳐놓은 좌판에서였다. 늙수그레한 아주머니와 할머니 두 분. 세 사람 좌판에는 비슷하게 호박, 무, 고추 등이 놓여있었다. 맨 가에 앉은 아주머니 좌판에서 호박 한 개를 집는데 옆 할머니 좌판 아래가 얼핏 보였다. 바구니에 들어있는 호박들. 연한 연두색에 동글동글한 것이 아기 피부처럼 야들야들할 것 같았다. 그런 것이 세 개나 있었다. 횡재였다. 처음 집었던 것을 슬그머니 놓고 조금 더 큰 것까지 다섯 덩이를 모두 샀다. 한 아름인데 6,500원이란다. 돈을 내밀자 옆 아주머니가 자기 것을 판 양 좋아했다.


  “정말 좋은 것만 쏙쏙 골라 잘도 사시네. 진짜 잘 사신 거여.”


  자기 물건을 먼저 집었다 놓았으니 서운할 법도 한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미안했다. 코로나 때문인지 좌판 사이가 조금 벌어진 것 같았지만 그들 마음의 거리까지 벌리지는 못한 것일까.


  호박을 씻어 물기를 닦아내고 칼질을 했다. 뽀얗고 여린 속살이 사각거렸다. 아차 하면 부드러운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왜 제일 좋은 호박을 아래에 두고 있었을까? 그냥 놓다 보니 위에 있던 것부터 올려놓은 것일까? 덜 예쁜 것부터 팔아야 나중에 물건이 남을 걱정이 없어서였을까? 아니, 옆 사람 호박과 비교되는 예쁜 것을 혼자 좌판에 올리기 미안했던 것일 게다.' 혼자 묻고 대답하다 보니 고작 6,500원에 그들의 아기자기한 이야기까지 보듬어 온 것 같았다. 길가에 옹기종기 앉은 여자들. 고단한 듯하면서도 어깨가 스치는 촉촉한 삶의 이야기가 들려올 것만 같아 귀를 기울이며 칼질했다.


  “똑, 똑, 똑, 뚝!”


  호박 한쪽이 유난히 두껍게 저며졌다. 두 쪽으로 가르기엔 얇고, 한쪽으로는 너무 두꺼웠다.


  “칼질할 때 정신 팔면 큰일 나야. 그라고, 손목에 그렇게 심을 꽉 주면 쓴다냐. 니가 심쓸 것이 아니라 칼이 심을 받아야제. 그라다가는 니 손만 잡어야.”



  느닷없이 할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손에 힘을 빼야 하는데 그러면 칼자루를 놓칠 것만 같으니 참…. 칼과 나의 거리를 조절하는데 서툴기만 한 나. 그럴 때면 늘 할머니가 생각난다. 할머니는 어떻게 그리 고른 소리를 내며 칼질을 할 수 있었을까? 무채를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고르게 썰던 할머니가 내가 저민 호박 조각을 보면 한숨을 쉬실 것 같다. 지금은 나도 할머니가 되었는데 왜 나는 아직도 그 힘의 거리를 가늠하지 못하고 저렇게 무딘 조각들을 만드는 것인지. 나는 언제쯤 그렇게 고르게 칼질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지만 아직도 모든 것이 듬성듬성한 내 삶처럼 그런 날은 좀체 올 것 같지 않다. 


  채반 정리를 했다. 벌써 여남은 개를 말리는 중이라 채반이 넉넉지 않다. 말라가는 것들끼리 모아두고 새로 썬 것들을 촘촘하게 널었다. 호박이 바삭하게 말라가며 햇살과 바람과 밤이슬까지 골고루 마시기에는 우리 집 발코니가 그리 맘 편한 곳은 아니다. 햇살과 바람이야 어찌어찌 맞아들인다 해도 밤이슬을 맞을 수 있는 곳은 에어컨 실외기 위가 고작이니 번갈아 그 자리를 나눠주어야 한다. 다행히 요즘 며칠 짱짱한 가을 햇살이 참 고맙다. 여느 해는 이렇게 매일 길가 좌판에서 때맞춰 호박을 사 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하늘 봐가며 맘껏 사들일 수 있는 것이 코로나로 발이 묶인 덕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덕’을 붙이기에는 어쩐지 떨떠름한 채 호박을 널었다. 


  조금 비좁게 다닥다닥 붙여 바깥으로 내놓으면 어느새 그것들은 제 좁은 자리를 탓하지 않고 서로 간의 거리를 나누며 몸을 추스른다. 햇살로 마음이 부르다 보니 좁아진 자리에 부려진 몸을 재바르게 추스르는 것인가. 그렇게 두어 번 뒤척이고 나면 그 좁던 자리가 성글어지고 그 빈자리에 누군가 또 들어앉게 된다.

 

  새로 저민 호박들이 채반에 비좁게 들어앉았다. 조금씩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도 그들은 밀쳐내지도 타박하지도 않으면서 잠시 햇살 아래서 숨을 고를 것이다. 그리고 내일쯤은 조금 줄어든 몸피로 그들 간의 적당한 거리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 거리에는 햇살이 스며들고 가을바람이 노닐다가 어쩌면 밤이슬에 젖어 깜박 잠이 들지도 모른다.


  코로나로 계절이 세 번이나 바뀌고 난 지금, 새롭게 익숙해진 단어가 ‘사회적 거리 두기’다. 사람들이 불편해하지 않는 거리는 친밀도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그런저런 것 가리지 않고 무조건 몇 미터씩 정해진 거리를 두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 가까이 다가서면 뒤로 물러선다. 


  그 거리에서는 언어가 시들고 따뜻한 눈빛도 스러진다. 심장을 펄떡거리게 하는 열기는 사라지고 스산한 바람으로 삭막해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느새 그 거리에 익숙해져 가는 것 같다. 이런 것은 아니라고 아무리 도리질해도 서서히 그 거리에 어울리는 언어와 눈빛들이 태어나고 자리를 잡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에 찬바람이 훑고 가는 것 같다.


  그런데 거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뉴스를 보면 단골로 등장하는 사람들. 그들에게서는 거리가 보이지 않는다. 내 편이라고 너무 찰싹 달라붙어 있어 아예 거리가 없거나, 우주의 반대편에 서기라도 한 듯 광년으로 계산해야 할 거리감에 거리를 눈에 담을 수가 없다. 그 속에서 언어는 싹도 틔우지 못한다. 트기도 전에 마른 가루로 흩날리거나 더러는 석화하여 거대한 암석이 되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거리. 그들의 거리는 어떻게 하면 눈 안에 들어오는 ‘사회적 거리’라도 될까. 그런데 사실은 그런 생각을 하는 나 또한 그들과 닿지 않는 거리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지.


  먼저 널어놓았던 채반에는 거의 말라가는 호박오가리가 희게 반짝인다. 그들 사이 적당히 성근 거리 사이에 잠시 바람이 간질이는지 바스락 소리가 난다. 말라서 버석거리면서도 더러는 어깨를 맞댄 그들이 만들어 낸 지밀至密 거리의 언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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