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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경 Oct 31. 2023

잃어버린 지갑



  옷장 선반에 낡은 가방을 본 순간 참 오랜만에 가평의 아름다운 숲길을 떠올렸다. 낮에 지하철에서 일 때문이다.



  “지갑을 잃어버렸어요. 교통비라도 좀….”


  떨리는 것 같은 나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단정한 옷차림에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사람이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손을 내미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저런 사연이 써진 종이를 건넨다. 그 사연들이 어디까지 진실한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내미는 손길을 외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난 그들을 외면했다. 그들 뒤에 폭력조직이 버티고 있고 그들의 사연이라는 것은 대부분 날조된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다음부터였다. 그렇다고 외면하는 것이 그리 마음 편한 것도 아니다. ‘엉거주춤’, 그들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그 네 글자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갑을 잃어버렸다지 않은가. 저 당황한 모습이라니. 어쩌다 지갑을 잃어버렸을까, 얼마나 막막할까, 얼마를 주어야 교통비가 될까 생각하며 지갑을 꺼내는데,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날 선 소리가 들렸다. 


  “날마다 잃어버릴 지갑이 있으니 좋겠네. 너도 참 순진하다야.”


  옆자리에 앉아있던 친구가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옆 칸으로 가버렸다. 지갑을 꺼내든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게 친구가 씹어 뱉듯 말했다.


  “처음에 깜빡 속았다. 저 모습에 안 속을 수가 없잖니. 그런데 상습범이야.”


  그 사람을 네 번째 마주치는 거라고 했다. 얼마나 간절해 보이는지 처음엔 깜빡 속았고, 두 번째는 좀 어처구니가 없었고, 세 번째는 화가 났지만 참았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지갑을 꺼내는 걸 보니 참을 수가 없더란다.

“내가 재수가 없는지 저 사람이 재수가 없는지…, 근데 우리 그렇게 호구처럼 보이냐?”


  차라리 구걸하지 왜 거짓말하느냐며 그 사람이 사라진 문 쪽을 흘겨보는 것이 여차하면 쫓아가기라도 할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외면하는 걸인에게도 “가서 뺏기는 것은 그 사람 몫, 주는 것은 내 몫”이라며 늘 지갑을 여는 친구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한 번 만나기도 힘든 거짓말쟁이를 그렇게 여러 번 만났나 보다. 덕분에 나는 바보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돈을 주었더라면 돌아서서 얼마나 비웃었을까 생각하면 기가 막혔다.


  쫓기다시피 다른 칸으로 건너간 사람은 그 칸에서도 역시 누군가 한 사람을 물색해서 천연덕스럽게 잃어버린 지갑을 연기하지 않았을까. 지하철을 내리고도 그 사람 생각에 내내 찜찜했다.

  



  가방은 모서리 가죽이 닳고 해진 곳도 있다. 그 가방이 새것일 때, 나는 호명산 ‘환상의 드라이브 길’에 매료되어 틈만 나면 백 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찾았다. 여름방학 중 아침부터 비가 내린 날,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마음이 설렜다. 마침 Y에게서 전화가 왔다. “물안개 때문에” 100여 km를 달려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다. 멋진 길을 알려준다는 말에 차도 그가 가져왔다. 운전하며 보는 것과는 또 다른 풍경에 청평호를 지나고 복장리를 지나면서 이미 구름 위를 걷고 있었다. 몽롱한 기분으로 갤러리 카페에서 멈췄다. 야외 정자 아래로 보이던 가파른 절벽은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가려 햇솜을 깔아놓은 것 같았다. 그대로 훌쩍 뛰어내려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것 같은 선경. 차 마시는 동안 우리는 우화등선羽化登仙 했다.


  가방이 없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양수리를 지나온 다음이었다. 신선이 선계에서 추락하는 것은 순간이었다. 운해가 보이는 카페 창가에 놓았던 가방은 초등학교 교사의 얄팍한 월급봉투가 감당하기는 과한 것이다. 그다지 욕심도 내지 않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명품이었다. 더구나 그 속에는 가방값보다 많은 지폐가 담긴 봉투도 들어있었다. 현금을 가지고 다니던 때였고, 하필 저녁에 목돈을 치를 일이 있었다. 미처 사랑 땜도 못한 명품 가방보다 당장 치러야 할 돈에 더 가슴을 졸였다. 이미 30km 넘게 와버렸으니 분명 그동안 사람이 드나들었으리라. 차를 돌리면서도 가방이 놓였던 빈자리만 확인할 거라는 생각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물안개마저 잦아들고 초라한 중생이 되어 돌아간 곳, 창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잠깐의 환상에 대한 대가로는 혹독했다. 당장 치러야 할 돈을 마련할 길은 막막했다. 정신 빠진 사람이라는 소리 들을 각오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쭈뼛거리며 계산대에 물었다.


  “아, 이거요! 아까 바깥 정자 창가에서 주웠다며 주인이 꼭 찾으러 올 거라고 하던데.”


  늘 겪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그늘과 양지의 차이는 순간에 삶의 색이 바뀌는 것이었다. 명품 축에 드는 가방, 두툼한 돈 봉투의 유혹, 더구나 다른 손님도 없었다고 했다. 아닌 척 달래던 눈물이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나들이했다. 그날 진경珍景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고마운 마음이었다. 우화등선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가방을 보며 그날 그 느낌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지하철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다며 거짓 구걸을 하던 사람은 잃어버린 지갑을 찾기 위해 수십 킬로미터를 가슴 졸이며 찾아가 본 적이 있을까? 그것을 찾고 감사의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을까? 그가 결코 알 수 없을 그날의 밝고 환함을 돌이켜보며, 그 벅참을 결코 알지 못할 그가 너무 안타까웠다.


  어제 잃었던 지갑을 찾을 생각도 없이 또 오늘 잃어버릴 지갑을 만들어야 하는 그의 거짓된 입술에서 그의 지갑은 매일 같이 버려질 것이다. 그것은 지갑이 아니라 그의 삶이리라.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삶. 그는 지갑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낡은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날을 다시 생각한다. 더 이상 외출에 동반할 수 없게 되었지만 버리지 못하고 장롱 안에 넣어두며 그날 그 마음을 잊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새 난 그날을 잊어가고 있었다. 길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 사람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 나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도 잃은 줄도 모르고 먼 길을 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돌아갈 시간이 더 늦어지기 전 무엇을 잃어버린 것이나 없는지 다시 한번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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