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후 5시면 사무실에 돌아와 하루 점검을 정리하고 6시에 퇴근한다. 한번은 5시에 일과를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섰는데, 그 점잖은 사람이 욕을 욕을 하고 섰다. 이과장이다. 그 옆에서 민과장도 거든다.
“아, X놈의 세끼들이 사람을 뭘로 보고 X랄이야.”
“그러게 말이야.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나는 뭔 일인가 싶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가만히 들어 보니, 오늘 방문한 수용가에서 기분 나쁜 일을 당한 모양이다.
이과장은 우리 전기안전관리 부서에서 박사로 통한다. 이제 60인데, 평생 전기를 해 와서 전기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다. 보통 실무에서 전기를 익히면 컴퓨터로 일처리를 하는 데는 약하기 쉬운데, 이 과장은 그렇지 않다. 직무고시에 필요한 서류는 물론, 측정기계를 다루고, 그 데이터를 입력하고, 결과를 출력하는 데까지 능통하기 때문이다.
우리 부서가 전기안전관리라면 점검하는 분야가 약식수배전설비와 태양광발전기가 반반 정도다. 태양광발전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다. 나는 이제 자격증을 딴지 얼마 안 되어서 책을 펴서 시험을 본다면 정답은 풀어서 잘 맞출 수 있지만, 책을 덮고 실무로 들어가면 캄캄하다. 이과장은 이론도 실무도 박사인 셈이다.
“태양광 말이예요. 태양광 모듈에서 접속반으로 전기를 모으자면 직렬과 병렬이 섞여 있잖아요. 이거 계산에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니까요. 직렬로 연결하면 전압은 일정하지만, 전류는 배가 되요. 반대로 병렬로 연결하면 전압은 늘어나지만 전류는 일정해요. 이걸 곱하면 결국은 전력이 같은 값이 나오지만, 이걸 헷갈리지 말아야 해요.”
전기는 수학과 같아서 오차가 없다. 전기를 처음 공부할 때도 수학의 존재 이유가 전기를 위해서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이과장은 처음 실무에 접하는 내게 수학도 능숙하게 설명을 해 준다.
이런 이 과장이 왜 화가 난걸까?
“이 세끼들이 사람 새까맣고 볼품없다고 그러는지, 자기가 돈 주는 사람이라고 그러는지, 날 아주 우습게 봐. X같은 놈의 세끼들이 말이야.”
수용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한마디도 못하고 듣고만 있다가, 사무실에 들어와서, 우리끼리만 있으니까 속을 풀어내는 모양이다. 한참을 더 민과장과 한 방향으로 욕 배틀을 벌이는 듯하더니, 얼마 후에는 속이 풀렸는지 조용해졌다.
한번은 출근하기 전에 이과장에게 물었다.
“양평만남의 광장에 말이예요. 이번에는 커피머신에 연결하는 전선이 누전이 되어서 차단기가 내려간다고 봐 달래요. 지난번에는 간판에 불이 안 들어온다고 했었고, 그 전에는 또 편의점 매장에 전등이 안 들어온다고 했었거든요.”
“딱 잘라야 해요. 뭐 자기들이 돈 들여서 할 일을 우리한테 먼저 부탁을 해요. 공사업자한테 연락을 하면 출장비라도 줘야 하잖아요. 우리는 정기적으로 다니니까 만만하면 우리한테 얘기해요. 우리는 전기 사용이 안전한지 아닌지를 보는 사람이에요. 이미 문제가 있어서 안 되는 것은 업자를 불러서 돈 들여서 고쳐야 해요. 부장님, 고쳐 달라고 해도 고치지 마세요. 우리가 할 일을 진단하는 것뿐이에요. ‘뭐가 문제가 있다’ 요기까지 예요. 물론 간단한 것을 고쳐줄 수 있어요. 하지만 싸가지 없는 놈들은 작은 것이라도 자꾸 해 주면, 나중에는 안방까지 쓸어 달라고 해요. 내가 지난번에 그랬잖아요.”
지난번에 냈던 화가 다시 나는 모양이다. 욕이 다시 나오기 일보 직전이다.
욕을 하기는 전기안전관리 팀장인 이부장도 마찬가지다. 이부장은 한전이고 전기안전공사고 시청 직원이고 아무에게나 욕을 한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 빼고 다 욕을 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점심시간에 나 빼고 셋이, 이과장과 민과장과 이부장이 모여 점심을 먹으러 모이면, 틀림없이 내 욕도 하지 싶다. 하지만 지금 내가 듣는 데서 하지 않으니 뭐라 그럴 수도 없다. 이부장도 전기 업계에서 평생을 굴러먹고 살았다. 이과장과의 차이는 컴퓨터 사용능력이다. 부장이라고 우리가 하루 종일 돌고 와서 쓴 일지를 컴퓨터에 옮길 때 보면, 닭 두 마리가 모이를 쪼듯 한다. 양 손에 엄지와 검지를 치켜세우고 장지로만 토닥거린다.
“X발 놈들..., X랄이야....”
내가 이상한 세계에 들어와 있나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욕을 하지 않을 때는 또 멀쩡하다. 청소를 한다면 시간에 늦지 않게 와서 청소기 돌리고, 걸레질하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비누를 풀어서 변기는 물론 거울과 타일벽까지 꼼꼼하게 청소를 한다. 들고 날 때 인사도 친절하게 한다. 주말을 쉬고 월요일에 나가면 잘 쉬었느냐고 서로 이틀간의 안부를 묻는다. 휴가를 갔다가 돌아오면 뭘 했는지, 어딜 갔었는지,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지 묻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한다.
이들에게 욕이란 뭘까? 아마도 욕을 하는 대상이 미워서 그런 건 아닌 듯하다. 감정의 배설이다. 서운 한 것, 불만이 있는 것, 말하고 싶었는데 차마 못 한 것, 이런 것을 마음에 담아 두면, 차곡차곡 쌓여서 찌꺼기로 남아 있을까봐, 마음에서 배설을 하고 씻어 내는 절차다. 그래야 다음에 다시 만나면 남은 감정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다시 웃으면서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지난번에 좀 서운하게 했다고,
“너 지난번에 그랬지, 이번에 보자 내가 되갚아 줄 테다.”
그럴 순 없는 일이다. 매달 찾아가 보아야 하는 고객 아닌가? 감정을 실어 이번에는 되갚았다가는 회사로 전화라도 하는 날에는 큰일이 나는 것이다.
“안전관리자가 뭐 그래? 전기안전관리 재계약 고려할거야.”
라는 말은 나오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아무리 부당한 요구를 해도 빈정 상하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
지난주에는 출퇴근을 할 때 타고 다니는 자동차 타이어를 갈러 갔다. 몇 년 전에 앞 타이어를 새 걸로 바꾸고, 앞에 있던 타이어는 뒤쪽으로 바꿔 끼운 적이 있다. 뒷타이어가 많이 달았는지, 바퀴에서 공기압이 적다는 신호를 여러 번 받았었다. ‘좀 더 타자’, ‘좀 더 타자’ 하면서 빠진 공기압만 보충했다. 그러기를 몇 달을 버티다가 하는 수 없이 지난번처럼 가서 앞바퀴를 뒤로 보내고, 앞바퀴는 새 걸로 갈았다.
“타이어 갈러 왔어요. 갈기 전에 제가 여러 번 공기압만 보충하러 왔었는데, 그 때마다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시고 손수 봐 주시기도 해서, 다른 곳에서 갈러 오라고 여러 군데서 제의했어도, 여기를 찾아 왔어요.”
“잘 오셨어요. 서운하고 귀찮다고 고객에게 짜증을 낼 수 있나요.”
우리도 같은 이치다. 아무리 수용가에서 부당한 요구를 해도 화를 낼 수는 없다. 우리의 역할을 이해시키고 양해를 구해야 한다. 물론 전등 한 두 개를 갈아 줄 수 있다. 콘덴서 하나쯤은 교체해 줄 수 있다. 마그네트는 연결부위가 복잡해서 사진을 찍어서 두고 하나하나 연결해 줄 수는 있다. 교체할 물건을 구비해 놓고 있을 때 이야기다. 하지만 작업비가 적잖이 들고 인건비가 소요 될 만한 것은 거절해야 마땅하다. 이런 걸 요구받았을 때는 고객이 화를 내어 관계에 금이 가지 않도록 손봐주기는 하지만, 들어와서는 욕을 욕을 퍼 붓고 감정을 배설하는 것이다. 함께 있는 동료들은 그걸 또 맞장구를 친다. 같은 방향의 욕이다. 셋이 이 장구 저 장구에다가 북까지 동원해서 욕을 해 댄다. 나는 꽹과리 들고 함께 덤빌까 하다가도, 그냥 웃고 만다. 이번에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왜요? 이번에는 또 왜 그러는데요?”
이과장이 자기가 오늘 당한 일을 이야기한다.
“가남에 태양광 점검을 하러 갔어요. 개가 갑자기 달려드는 거예요. 하마터면 발목을 물릴 뻔 했다 아입니껴. 투덜투덜하는데 주인이 물어요, 왜 그러냐고. 엉겹결에 ‘저놈의 개세끼가 사람을 물려고 그런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집 주인이 뭐라고 그러는 줄 알아요? ‘왜 우리 애를 보고 개세끼라고 그러냐?’는 거예요. 사람을 물려고 한 개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개세끼한테 개세끼라고 했다고 사람을 나무라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되요? ‘개는 맞는데 개세끼는 아니라’는 거예요. 내 참 기가 막히더라고요. X친 세끼가 말이에요.”
나는 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강아지에게 손을 내 밀면서 ‘엄마한테 와, 엄마한테....’ 하는 장면을 TV에서도 봤다. ‘아빠가 얘 좀 안고 있어’하고 남편에게 넘겨주기도 한다. 이건 개가 사람만큼 높아진 건지, 사람이 개만큼 낮아진 건지 모르겠다. 개가 사람만큼 높아졌다면 물려고 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당한 이과장이 화를 낼만했다.
육체는 밥을 먹고 육체의 배설을 한다. 사람의 마음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주고받은 관계를 통해 감정을 먹고 마음의 배설을 해야 한다. 육체가 영양분을 흡수하고 찌꺼기를 내 보내듯이, 마음은 좋은 감정은 받아들이고 나쁜 감정을 밖으로 내 보내야 한다. 좋은 감정은 마음에 약이 되고 자존감이 되지만, 나쁜 감정은 기분을 상하게 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쁜 감정, 수용가에게서 받은 기분 나쁜 일을, 마음에서 내 보내느라고 욕을 하는 것이다. 욕을 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다. 배설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한 다리씩 거들고 욕을 해대니 얼마나 속이 후련할까?
며칠 전에 해일이가 의자에 앉아 노는 동영상을 해일이 아빠가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기분 좋게 응얼거리던 하일이가 소리를 지르다가 ‘뿡-’하는 소리가 났다. 거기에 멘트가 달리기를
“급똥 ♥”
하고 달렸다. 조금 표정을 가다듬더니, 해일이가 이전보다 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똥을 싸기 전보다도 똥을 싸고는 더 기분이 좋아진 표정이었다. 이걸 본 해일이 고모가 또 ‘좋아요’를 눌렀다. 잘 먹고 잘 싸는 것을 보니 좋다는 것이다. 마음도 배설을 하느라고 욕을 하는 걸 응원해 줄 수 있을까?
세상에 모든 생물이 먹이를 흡수해서 그 영양분으로 신진대사를 하고, 남은 것은 찌꺼기로 배설을 한다. 소화하고 남은 것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배설이라고 한다. 소화하지 못해서 필요하지 않은 것을 내 보내는 것을 배출이라고 한다. 배설이 됐든 배출이 됐든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은 몸 밖으로 내 보내야만 한다. 그래야 건강하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욕을 펑펑하고 사는 사람은 성격도 놓아서 화통하게 잘 살아가는 편이다. 정신병에 걸리고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치고 욕을 퍼붓는 사람이 없다. 마음의 배설기관이 고장이 나서 배설을 못하다보니까 속에서 썩어 문드러지는 것이다.
요즘 여름철이라 냉면을 많이 찾는다. 한 스님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식당을 들어서더니 냉면을 주문하더란다. 스님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종업원이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스님, 냉면 고명으로 고기 한 점이 얹히는데 그건 어떡할까요?”
스님이 눈을 부라리며 작은 소리로 속삭이더란다.
“밑에다 깔아, 세끼야.”
아마 이 스님은 무더운 여름 같은 이생의 인연을 성큼성큼 잘 건너갈 것 같다.
예수님도 속이 확 풀리는 욕을 했다고 성경에도 기록이 되어 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마12:34)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하려고 6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요한도 욕을 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
욕 한번 속이 후련하게 했다. 우리 사무실에서 듣는 욕처럼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낄 수 있다. 카타르시스는 그리스어다. 우리말은 감정의 정화(淨化)다. 그런데 다른 뜻이 또 하나 있다. 그게 뭔지 아는가? 배변(排便)이라는 뜻도 있다. 해일이가 똥을 싸는 즐거움이나, 이과장이 욕을 해대는 즐거움이나, 똑같은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말이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욕을 한 것을 보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당시 사회를 향한 통렬한 일침이었다. 예수님의 욕은 거짓된 사회를 이길 자신감에서 나왔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도, 부활로 다시 살아 바로잡고야 말 자신감에서 나왔다. 세례요한의 욕은 목숨을 걸어도 무섭지 않는 무게가 실려있다. 그러고 보면 욕도, 그 잘못된 상황을 다음에 또 만나면 이길 힘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힘이 없으면 욕도 못한다. 마음의 힘, 정서적인 힘, 정신의 힘이 있어야 욕도 할 수 있다. 욕을 저주라고 보지 말고, 마음의 배설로 보자. 이 무더운 여름이 소나기 한차례 하듯이, 답답한 현실에 욕 한마디 푸지게 하고 이겨 보자. 나도 꽹과리를 함께 치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