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전에도 점장이 전화를 했었다. 성탄절에 아내와 오랜만에 산을 간다고 나섰는데, 원주에 있는 소금산 계단을 말 오르려는데 전화를 했었다. 해가 가기 전에 가게에 한 번 와서 점심을 드시란다. 그냥 인사려니 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부터 아주 전기를 수리할 책임자를 좀 만나 달란다.
“기사님, 이 건물을 지을 때 깊이 관여했던 분에게 여기 가게 전기 이야기를 했더니, 기사님을 좀 뵙게 해 달라는데요. 기사님 말씀을 들어 보고 결정을 해야겠다고요. 오후 5시에 저녁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사모님과 함께 오셔서 식사를 좀 하시지요?”
“아니, 뭐, 저녁은 됐고요, 그 건물의 전기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가겠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아내에게까지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단다. 이는 성박사인생고기의 점장과의 관계가 그냥 업무 관련 일로 스쳐지나가는 관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만큼 우리 관계의 역사는 길다. 점장을 처음 만난 건 열대야가 보름을 넘게 지속되던 지난여름부터다. 무더위가 길수록 에어컨을 많이 켰는데, 에어컨이 생활 전기기기 중에 전기를 가장 많이 먹는 기기 중에 하나다. 성박사인생고기의 메인 판넬에 1차측 전선에 탄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열화상 카메라가 측정한 온도가 60˚C를 넘었고, 만져보면 아스팔트만큼 뜨끈뜨끈했다. 점장이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기간만큼 가게의 전기시설의 심각성도 알게 되었다. 판넬 인입전선의 고열에다가, 콘센트도 비만 오면 누전으로 차단기가 뚝뚝 떨어지고, 무슨 놈의 배전반이 다락 저 안쪽에 붙어 있느냐 말이다. 주방의 냉동고, 냉장고, 세척기는 리드 선에 연결, 또 연결, 연결에 연결을 해서 썼다. 요즘 탄핵 당한 대통령에, 대통령 대행에, 대행의 대행으로 건너뛰듯이 이어서 썼다.
“부장님 견적 좀 내 주세요. 아무래도 공사를 해야할 것 같아요.”
“어디까지 공사를 하시게요.”
“뭘요, 다 해야지요. 2호실 배전반 확장, 천장에 든 배전반을 이쪽 벽으로 끄집어내기, 누전되는 선 새로 깔기, 주방에 세척기와 냉동고 냉장고는 단독 누전차단기 설치까지지요.”
나는 회사에 연락을 해서 공사부장을 불렀다. 공사부장이 견적을 내겠다고 와서는, 회사에서는 따로 보자고 했다.
“부장님, 난 그 가게에 공사를 안 하고 싶어요.”
“왜요?”
“거기 전기공사가 본래 엉망이에요. 아무리 공사비를 많이 준다고 해도, 공사를 하면 일단의 책임은 제게 있어요. 회사는 공사비만 받으면 끝이에요. 책임이 없어요. 모든 책임은 손 댄 사람이 져야 해요. 제는 거기 손 댈 생각이 없어요.”
“그 정도에요?”
그렇다. 부장 심정도 이해가 간다. 공사비를 많이 받으면 회사는 좋겠지만, 공사에 대한 사후 책임은 회사가 지는 것이 아니다. 5년이고, 10년이고, 공사에 대한 책임은 공사를 한 김부장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다. 안전관리에 대한 책임은 안전관리자에게 있다. 회사나 대표가 책임을 질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나도 문제점을 지적하고, 심각성을 일깨워 준다. 성박사인생고기에 갈 때마다 잔뜩 적어 준다. 내가 지적을 해도 고치지 않는 것은 사업주의 책임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가 지적을 하면 점장은 고마워했다. 그게 맞는 태도이긴 하다. 그래서 난 또 점장이 요구하는 걸 들어 주려고 애를 썼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또는 커피 자판기를 누를 때마다, 전기가 온다는 것을 접지 단자를 되살리거나 접지 시설을 설치해서 해결해 주었다. 콘센트도 갈아 주고, 간판의 타이머도 조정해 주었다.
그래도 뭐 그것 가지고 연말이 되기 전에 식사 한 끼 대접하겠다고 그러겠는가? 그걸 또 먹겠다고 내가 가겠는가? 반년 넘게 끌어 온 전기 공사를 끈질기게 하겠다고, 건물 관계자 중에 실세를 만나 달라기에 갔다.
역시 점장이다. 1호 실로 가라고 해서 갔더니, 입구에 내 이름을 크게 써서 붙이고는 예약석이라고 이미 세팅을 해 두었다. 갑자기, 뭔, 귀한 손님이라도 된 듯하다. 잠시 앉아서 이 가게 전기 사정을 생각했다. 전기의 문제점을 물으면 대답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수전용량이 90kw고, 경충대로 동쪽으로 길게 한 줄로 가게를 지은 건물이다. 북쪽으로 맨 위는 편의점이 있고, 그 아래로 성박사인생고기가 있다. 고깃간보다 더 길게 부동산 공인중개소가 있고, 그 아래로 또 그만한 길이로 도자기 가게가 있다. 한 건물이니까 전기도 한 곳에서 수전을 해서 계량기를 각각 나눠서 쓰고 있다. 전기가 늘 문제였다. 주방장 아주머니는 냉장고를 열 때마다 전기가 찌릿찌릿 온다고 야단이고, 육간에서는 콘센트에 물이 들어가 퍽퍽 소리가 난다고 그러고, 점장은 수시로 전화를 해서 ‘기사님....’하고 콧소리를 했다. 이제 근본적으로 고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잠시 앉아 있다니까, 키가 작달막한 야무지게 생긴 사람이 식탁으로 다가 온다. 가게를 바쁘게 돌보던 점장이 불쑥 나타나 소개를 한다.
“작은 아버님 이분이 전기 기사님이십니다.”
“기사님, 작은 아버님. 이분이 이 건물을 지을 때 깊이 관여하셔서 이 건물 사정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오늘 이 건물 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좀 말씀해 주세요.”
통성명을 하고 마주 앉았다. 그 사이 점장의 안내로 직원들이 고깃상을 차린다. 인생고기를 차린다. 상을 차리는 사이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은 아버님이라는 분이 먼저 이야기를 한다.
“먼저 제가 이 건물 사정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기 고깃간 점장이 전기 문제가 심각하다고 공사를 해야 한다고 하니 말입니다.”
“예, 그렇게 하시지요.”
인생고기라고 하더니, 불그스름한 고기가 싱싱해 보인다.
“저는 이 건물 가장 남쪽에 있는 도자기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내 위에 형님이 그 위에 부동산을 하고 있고요, 그 위에 큰 형님이 이 가게 주인입니다. 지금은 연세가 많아서 손을 놓고, 조카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 위에 편의점은 누님의 것입니다. 부모님이 여기에 건물을 지어서 4남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신 것입니다.”
“그렇군요. 부럽습니다. 유산을 다 받으시고요.”
“아이, 뭐 별거 아닙니다.... 이 건물을 2008년에 지었습니다. 한 27년 됐지요. 당시에는 전기도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여기 식당 외에는 전기 문제는 없습니다. 부동산이나 도자기점이나 편의점에 전기를 틀어야 뭐 얼마나 쓰겠습니까? 여름에 에어컨이 전부고, 겨울이면 전열기 틀면 되고, 전등밖에 더 켜겠습니까? 그런데 식당은 다르더라고요. 20년 전보다 사용하는 기기들이 많이 늘었어요. 그때는 식기세척기도 없었잖아요. 냉장고도 여러 대, 냉동고도 여러 대, 에어컨도 용량이 엄청 커졌어요. 그래서 손을 봐야하겠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문제인지, 어떻게 수리를 할 건지에 대해서 기사님의 전문적인 견해를 듣고 싶어서 모셨습니다. 한번 이야기 해 주시지요.”
“예, 그럼, 한번 직접 보시고 말씀을 드릴게요. 저쪽 판넬로 좀 가실까요?”
옆방인 2호실에 있는 판넬로 앞장을 섰다.
“따라 오시지요.”
판넬문을 열었다. 60 X 80 cm 되는 소형판넬이다. 판넬 안이 그득하다. 화투장 하나만한 여유도 없다. 전선만 많은 것이 아니다.
“여기 좀 보세요. 정전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고, 더 중요한 것은 만에 하나 판넬을 열었다가 잘 못 짚어 버스바(Bus Bar)를 건드리지 말라고 막아 둔 아크릴 판 안에도 전선이 들어 있어요. 증설을 하느라고 아크릴판 안에 버스바에서 전기를 따고 밖으로 바로 빼내지 않고 버스바 위를 그냥 지나갔어요.”
“그러네, 심각하네요.”
“또 문제는 그래도 증설을 또 하느라고 버스바 끝에서 4개를 땄잖아요. 그건 누전차단기에 연결할 수도 없어서 바로 판넬 밖으로 빼서 나갔어요. 차단기를 달 여유공간이 없어서 그랬는가 봐요. 이건 과열되거나 단락이 되면 가장 위에 있는 메인차단기를 떨어트리든지, 메인차단기 용량 안에서 과열됐다가는 불이 바로 붙어요.”
“그러네요.”
“간판은 나중에 증설을 했는지 타이머를 달 공간이 없으니까 판넬 밖에다가 설치를 했습니다. 이게 지금 쓰고 있는 간판의 타이머인가 봐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선 급한 것은 이 판넬을 증설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1.5배는 되는 판넬로 갈아야 합니다. 아주 넉넉하게 하려면 두 배가 되는 판넬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자리에 돌아와서는 다른 곳에서 찍은 판넬을 보여 주었다. 군부대에 있는 판넬이다. 점검을 하고 관리관에게 매번 보내주기 위해 찍은 사진이다.
“여길 보세요. 이 판넬 안은 깔끔하지요? 먼저 압착단자에 찍어서 차단기에 연결한 전선은 중력에 의해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판넬 테두리로 보내서 묶어 줘야 합니다. 전선이 다른 차단기 위를 지나가거나 전선끼리 얽히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의 차단기에 두 선이 물리면 안 됩니다. 될 수 있으면 한 단자씩 물려야 합니다. 그런데 저 판넬에서는 두 단자씩 물린 것이 여러 개이지 않습니까?”
“예, 잘 알겠습니다. 우선 시급한 것이 판넬이군요.”
“거기다가 제가 점검을 할 때마다 열화상카메라로 찍어 보는데, 메인 차단기 1차측에서 열이 나요. 아까 보셨지요? 붉은색 압착단자 카바가 새까맣게 변한 것 말입니다. 탄화가 되어 그런 겁니다. 고열이 오래 지속이 되니까 탄 것입니다.”
“예, 봤습니다.”
“판넬은 좁은데, 여유 공간은 없지요, 거기다가 그럴수록 열은 더 나지요, 화재의 위험이 아주 높습니다. 오죽하면 내가 점장님에 그랬겠어요. 문제점을 점검할 때마다 써 주고는, ‘이거 주인에게 전달해 주세요. 점장님은 전달만 해 주시면 됩니다. 책임은 집 주인에게 있어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돼서 모든 책임이 집 주인에게 있어요. 불이 나서 타면, 전기화재는 끌 수도 없어요. 전선 속에서 타는데 어떻게 꺼요. 특히 이 건물은 판넬 건물이네. 전소에요, 전소. 그 대신 사람은 다치지 않게 점장님이 잘 안내해 주세요’라고 했어요.”
“맞아요. 샌드위치 판넬건물에다가, 전선관 안에서 불이 붙었는데, 불이 붙는 순간에 끝이지요.”
서로 이야기를 하는 중에 나는 전기 상태를 이야기 하고, 작은 아버지는 고기를 굽는다. 숯불에 소고기 벌건 덩어리를 올려놓고, 지글지글 굽고 있다. 예사 솜씨가 아니다. 며칠 전에 재영이가 다시 해병대 부사관으로 간다고 입대하기 전날 모여서 소고기를 먹을 때는 내가 구웠는데, 지금은 나는 손 놓고 있고, 점장이 작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이 전적으로 집게와 가위를 들고 굽고 오리고 뒤집는다.
“기사님, 잘 알겠습니다.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런데, 고기 굽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으십니다. 고깃집 작은아버지시라서 그렇습니까?”
“그게 아니라, 제가 어디를 가나 고기 굽은 것은 제 담당입니다. 보세요. 잘 굽지요? 고기는 이렇게 구워야 합니다. 어느 모임에 가든지, 가족들이 모이든지, 특히 소고기는 제가 굽습니다. 제가 구워야 맛있어요. 고급 고기는 아깝잖아요. 보세요, 하나도 타지도 않지요. 왜 흔히 타면 가위로 잘라 내고 먹고 그러잖아요. 내가 구우면 타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저도 지난번에 구웠는데, 제가 굽은 것과는 많이 다른데요. 기술 좀 알려 주세요.”
“하하, 그러지요. 자, 보세요. 먼저 양쪽을 뒤집어서 조금 구워요. 그런 다음에 한 입에 쏙 들어가도록 잘라요. 자를 때는 불을 약하게 놓아야 합니다. 자르는 사이에 먼저 놓은 것은 타니까요. 다 자르면 불을 키우고 불판 위에서 살살 굴려 주는 겁니다. 굴리면서 익히면 자른 단면도 익어요. 다 익었다 싶으면 다시 불을 약하게 놓고, 고기는 불판 가로 옮겨 놓는 겁니다. 그러고 먹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렇게 구우면 불판 갈아 달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어디를 가도 불판 갈아 달라고 하지 않아요. 탄 음식을 먹지도 않고요. 이게 기술입니다.”
“야, 좋은 것 배웠습니다..”
“고기는 이제 늙은 우리가 구워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열심히 먹어야 하잖아요. 우리는 많이 먹으면 안 되니까, 그 대신 굽는 겁니다.”
“하하, 그렇군요.”
“실례하지만, 기사님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예, 저는 돼지띱니다.”
“돼지띠? 59년생입니까? 나는 55년생인데....”
“예? 얼굴에 주름도 없고, 머리도 새까맣고 해서, 나는 나보다 어리신줄 알았습니다. 한참 형님이시군요. 70이 넘으셨습니까?”
작은 아버지가 구워 주는 고기 맛도 좋고, 둘이 오늘 처음 만나지만 나누는 이야기도 즐겁다.
“기사님, 휴일에는 어떤 취미를 가지고 계십니까? 요즘은 뭐 한 가지씩은 다들 하던데....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하거나, 악기를 다루거나 말입니다.”
“예, 저는 글을 씁니다.”
“글이요? 어떤 글을 쓰십니까? 시, 소설, 에세이....?”
“제가 고층건물 관리소장을 하다가 안전관리를 하러 처음 들어갔을 때, 일주일 만에 글이 써지는 겁니다. 안전관리가 좀 힘들기는 해요. 하지만 일주일 동안 만난 사람들, 안전관리를 하면서 겪은 일들, 일반 사람들에게는 전기가 생소하니까 좀 쉽게 안내도 할 겸 해서, 주기(週記) 식으로 있었던 일을 적습니다. 일은 좀 힘들어도 글 쓰는 재미에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함께 고기 먹은 이야기도 언젠가 글로 될 수도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멀리 가지도 않고, 지금 작은 아버지와 있었던 일이 일주일 만에 글로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글을 쓰신다면 어울리는 단체가 많을 텐데 주로 어떤 분들과 어울리십니까?”
야, 이 사람 봐라, 글의 세계를 뭔가 좀 아는 듯하다, 싶다. 그래도 내가 소속한 단체를 밝히는 수밖에 없다.
“문학계도 한국 정치와 똑같습니다. 크게 두 부류로 나누지요. 한국작가협회라고, 시나 소설이나 어떤 글도 역사의 진보와 생명의 존중에 기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참여문학 쪽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한국문인협회라고,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단체가 있어요.”
“그래, 기사님은 어느 쪽입니까?”
“예, 저는 한국작가협회요, 흔히 ‘한작’이라고 합니다. 요즘 노벨상을 받은 한강작가도 여기지요. 고은 시인이나, 나태주 시인, 한창훈 소설가나, 불멸의 이순신을 쓴 김탁환 소설가도 함께 어울립니다. 만나는 사람이 거창하지, 저는 안주나 축내는 무명작가일 뿐입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작품은 있지 않습니까?”
“예, 젊어서는 시를 썼는데, 지금은 산문을 씁니다.”
“그렇군요. 저는 한국문인협회 이천시지부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 어쩐지 오늘 처음 만났는데, 처음 만난 것 같지 않고, 이야기를 할수록 친근해진다 싶었습니다. 이천에서 오래 사셨고, 작품활동도 하셨으면 하실 이야기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제가 회장으로 활동할 때였어요. 순수문학이라서 정치에 관여를 하지 않는다고는 해요. 하지만 지켜야할 것은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가령 이런 겁니다. 지금 설봉공원에 시비를 여러 개 세웠는데, 그 중에 미당 서정주의 시비가 있었어요. 제가 그걸 철거했어요. 조선청년들이 일제의 대동아전쟁에 끌려가 가미가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산화했잖아요. 서정주가 이런 젊은이들을 찬양하는 ‘송정오장 송가’를 매일신보에 실었어요. 친일이지요. 친일문학을 했어요. 아무리 미당의 글이 빼어나다고 해도 친일문학을 발표한 사람을 기릴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예, 그렇지요.”
“또 한 사람의 비시도 철거했어요. 이천 사람인데, 이인직, ‘혈의 누’를 쓴 이인직의 시비도 치웠어요. 이완용의 개인비서로 일했고, 친일반민족행위자였어요. 아무리 이천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사람을 기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과감히 치웠지요.”
“잘 하셨네요.”
이천에서 평생을 사는 분인가 보다. 명함을 받았는데, 시인일 뿐 아니라, 소올밴드라고 개나리꽃 활짝 핀 봄날이면 설봉공원에서 색소폰 연주도 하는 악단장이기도 했다. 하기야 건물을 부모님으로부터 유산으로 받았는데, 대대로 살아 온 고향에서 여러 가지 활동도 하는 모양이다.
“오늘 참 반가웠습니다. 이천 토박이 분을 만나다니, 참 즐겁기도 했습니다.”
“지에스 전기에서는 이만한 공사를 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는 말씀이지요? 알겠습니다. 그 대신 공사업체가 뭘 물으면 대답을 잘 해 주실 것으로 믿겠습니다.”
“예, 전기 공사를 하는데, 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연락을 주세요. 얼마든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마 몇 달 전에 점장님이 다른 업체에서 견적을 하나 받은 것이 있을 겁니다. 그 업체에서 공사를 하셔도 됩니다. 제가 뭐든 도와 드리겠습니다.”
사실 공사부의 김부장은 여기서 견적을 여러 달 전부터 달라고 하는데도 탐탁지 않아 했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후한이 두렵다는 것이다. 애초에 신규로 하는 공사가 쉽지, 용량을 늘리는 공사나 증설을 하는 공사가 더 어렵다는 것이다. 전기는 더욱 그렇다. 우선 차단기야 용량이 큰 것으로 사다가 바꿔서 끼우면 된다. 하지만, 전선은 더 어렵다. 관 속에 든 것을 빼고 더 굵은 선으로 갈아 끼우기가 만만치 않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전선관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건 벽체 안에 들어 있어서 전선관을 꺼냈다가 다시 박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견적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우리 회사는 안전관리를 하다가 발생한 공사나 하지, 그리 큰 규모의 공사는 하기 어렵습니다. 인근의 전기공사업체를 알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요? 나는 기사님이 점검을 잘 해 주시고 꼼꼼하게 일해 주시니, 같은 회사라서 믿을 수 있어서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내가 믿음을 주었다면 다행이지만, 회사는 끈덕지게 성박사인생고기가 떨어져 나가지 않고, 몇 개월 째 공사 때문에 말이 오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 이게 잘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은 만나서 좋았는데, 전기 판넬을 열어보면 한숨부터 난다. 몇 달 후면 전기 판넬도 오늘 만난 작은 아버지처럼 시원시원하고 좋아질 수 있을까? 점장이 오랜만에 보신 좀 하시라고 한 상 잘 차렸는데, 고기만 먹고 왔다. 육회도 가지고 왔고, 냉면도 준비했단다. 작은아버지가 구워준 고기만 먹어도 배부르다. 올해 마지막 일요일 오후가 저물어 가고, 가게 간판 불이 하나 둘 켜지고, 가로등이 까무룩히 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