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11 낭독
(다소 길지만, 조르바의 대사는 직접 낭독을 권한다. 조르바의 입장에서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고 생각하면서 읽으면 훨씬 더 잘 와닿을 것이다.)
“당신이 묶인 줄이 다른 사람의 그것과 다를지는 모르지요. 그래요. 두목, 당신은 긴 줄에 매여 있습니다. 당신은 그 사이를 오고 가면서 그걸 자유롭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니 당신은 그 끈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 그러려면 단순해져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당신이 가진 모든 걸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겐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볼 생각은 않고 꼭 비상금을 남겨둡니다. 그러니 끈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자르다니요! 오히려 더 붙잡아 맬 뿐이오, 그 멍청한 놈은! 끈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멍청이는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합니다. 그러면 모든 게 막을 내리는 거지요. 그러니 인간이 이 끈을 자르지 못한다면 살 재미가 뭐가 있껬어요? 노란 배춧국 맛이지. 멀건 배춧국 말이오. 럼주 같은 맛이 나야 하는데 말이오. 그래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그리스인 조르바』, 느낌이 있는 책, p.511~512)
“이해하고말고. 그래서 당신에겐 안식이 없는 거요. 이해하지 못하면 편안할 텐데. 뭐가 모자라요? 젊겠다, 돈도 있겠다, 건강하겠다, 사람 좋겠다, 천하에 부족한 게 있나요? 하나도 없지. 한 가지만 제외하고! 그게 없으면 두목, 글쎼요.”
그는 다시 그 큰 머리를 흔들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조르바의 말이 모두 다 옳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초인에 대한 갈망과 충동에 사로잡혀 이 세상 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얌전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여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나누고 신에게로 띄운 내 연을 놓치지 않으려고 꼭 붙잡고 있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느낌이 있는 책, p.513)
그를 바라보며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만났다가는 헤어지는 우리들, 우리의 눈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몸매와 몸짓을 영원히 기하려고 하지만, 몇 년이 흘러도 그 눈이 검었는지 푸른 색깔이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부질없는 것임을 어떡하랴.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인간의 영혼은 옷쇠로 만들었어야 했다. 무쇠로 만들었어야 했다.’ 그 또한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느낌이 있는 책, p.510)
우리는 원래 다 벌거숭이였다. 선홍빛으로 물든, 주름진 피부를 가진 울보로 이 세상에 태어나 오로지 먹고 자고 싸는 것밖에 모르는 벌거숭이. 반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말이 트이면서 생각이 자람에 따라 나름대로 꿈이 생긴다. 세상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젊음은 영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생각보다 많고,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대단하지 않으며, 나보다 잘난 사람은 많고 젊음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점차 깨달아간다. 그러면서 현실적으로 변한다. 소위 ‘어른이 된다’, ‘철든다’라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현실의 이름으로’ 나이를 먹으면서 내 손에 쥐어진 것들을 놓지 못한다. 이걸 놓치면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없거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 채. 그러면서 스스로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나 조르바는 말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그냥 놓으라.’고. 한국 사회는 아직도 나이에 따른 단계를 설정하고 거기에 맞추지 못하면 실패자, 낙오자로 규정하는 문화, 남들과 비교하는 문화가 남아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내면의 자아와 공명하는 것을 거부하고 타인과 사회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무던히 애쓴다. 그렇게 ‘철든’ 어른들은 내면의 자아와 점차 멀어지고, 내면의 자아는 계속 방치되고 고립되며, 점차 ‘후회’라는 상처를 가슴에 쌓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이 상처를 쌓아가다가 임종 전에야 꺼내보며 내면의 자아와 다시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운 좋게도 빨리 내면의 자아와 화해하고 그와 융합하여 새로운 삶을 살기도 한다.
인생은 너무 짧고, 능력과 젊음은 유한한데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주인공이 말했듯,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고 무능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살아 있는 동안에 감사하고, 순간에 충실하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과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집착을 (아주)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아마 조르바가 생각하기에, 주인공에게 아주 중요하지만 결정적으로 없는 단 한 가지는 바로 ‘용기’ 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인생은 아주 냉정하고 잔인하다. 내려놓은 만큼 내어준다. 고통스러운 만큼 자유로워진다. 일명 ‘공짜 점심은 없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걸 다 알고 있기에 우리가 가진 줄을 그렇게도 꽉 붙잡으려 애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걸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에서 내면의 자아에게 상처를 준다면 한 번은 성찰할 일이다. 조르바는 우리에게 말한다. 너는 기꺼이 자유로워질 용기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