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어른'만이 진정한 사랑도 얻느니라. -에리히 프롬-
p.41~52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사랑은 수동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주는’ 것이라는 견해를, 프롬은 남녀의 성관계와 모성애로 설명한다. 프롬의 말을 보자
남성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성기를 여자에게 준다. 오르가슴의 순간에 남자는 정액을 여자에게 준다. 그는 능력이 있는 한, 정액을 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만일 줄 수 없다면 그는 성적 불능자이다. 여자의 경우, 비록 약간 더 복잡하기는 하지만, 사정은 다르지 않다. 여자도 자기 자신을 준다. 여자는 그녀의 여성성으로서의 중심을 향해 문을 열어준다. 받아들이는 행위에서 그녀는 주고 있는 것이다. 주는 행위가 불가능하다면, 받기만 한다면, 그녀는 불감증(不感症)이다. 여자의 경우, 준다는 행위는 애인으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어머니로서의 기능에서도 나타난다. 여자는 그녀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태아에게 자기 자신을 주고 유아에게 젖과 체온을 준다. 주지 않으면 오히여 고통스러울 것이다. (p.41)
물질적으로도, 줄 수 있는 사람이 줄 수 없는 사람보다 부자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는 단순히 많이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많이 가지고 있어도 줄 수 없다면 진정한 부자가 아니다.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안달을 하는 자는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많이 갖고 있더라도 가난한 사람, 가난해진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자다. 그는 자기를 남에게 줄 수 있는 자로서 자신을 경험한다.”(p.42) 그러므로 지나친 가난은 사람에게서 주는 기쁨을 빼앗아가므로 나쁘다. 아무리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해도, 본인의 생존을 위헙할 정도의 가난에 처하면 사람은 소심해지고 인색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떤 것을 준다고 할 때, 최소한의 생존이 위협받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물질적인 것보다 인간적인 것에 더 방점이 찍힌다. 프롬에 따르면, 사람은 사람에게 “자기 자신,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p.42) 그러나 이는 생명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의 생동하는 것의 표현이다. 즉,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顯示)를 주는 것이다.”(p.42) 이를 통해 사람은 타인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자신을 만족시키며, 자기 효능감과 유능감을 높인다. 즉, 이들은 자신이 무언가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좋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이렇게 먼저 좋은 것들을 타인에게 주면, 그에 감화된 타인도 자신에게 좋은 것을 돌려준다. 그러므로 주는 사람은 받은 사람의 ‘생명’을 받는다. 이렇게 두 사람 사이의 유대와 애착이 싹트고, 이 감정들은 두 사람의 내면을 키우는 자양분이 된다. 따라서, 프롬에 따르면, 사랑은 주는 것이며, 사랑하는 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능력이다. 프롬은 이런 능력을 ‘생산적 성격’으로 규정하며, 이러한 성격 발달의 정도에 따라 진정한 사랑이 가능여부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랑의 능동성은 타인에게 준다는 것에 더해 여러 형태의 사랑의 공통적 요소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이다. 먼저, 사랑에는 보호가 따른다. 부모의 자식 사랑, 동물이나 식물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형태의 사랑에는 적극적 관심이 전제된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p.45)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구약성서의 <요나서>에서 드러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이 요나에게 니느웨의 주민들에게 가서 그들이 악행을 그만두지 않으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것을 원치 않았던 요나는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고 도망 다니다가 고래 뱃속에 갇혔다. 하느님은 그를 구해주고,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명령을 전달한다. 그러자 요나가 염려한 대로 사람들은 죄를 뉘우쳤고 하느님은 니느웨를 파괴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요나는 절망하여 하느님이 그를 태양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만든 나무 그늘에서 간신히 위안을 느낀다. 그러나 하느님이 이 나무를 시들게 하자, 요나는 하느님에게 불평했고, 이에 하느님이 이렇게 말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덩굴을 네가 아꼈거늘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자가 12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p.45-46)
프롬은 이 이야기에서, 하느님이 요나에게 ‘무엇인가를 위해서’ 일하고, 무엇인가를 키우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며, 사랑과 노동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설명했다고 말한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일하고, 창조적 노동에서는 자신의 노동의 대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호와 관심에는 ‘책임’이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책임은 외부로부터 부과된 의무로 이해되지만, 프롬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책임은 다른 인간 존재의 요구-표현되었든, 표현되지 않았든-에 대한 나의 반응이며,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 수 있고, ‘응답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p.46)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고민과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써 그를 보호하려 한다. 부모가 자식의 삶을 책임지고, 형제자매 간에 서로를 책임지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이 없다면, 상대방에 대한 지배와 소유로 전락할 것이라고 프롬은 말한다. 그에 따르면, 존경은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이와 같이 존경은 착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p.47) 물론 집착도 마찬가지이다. 진정으로 존경하는 것은, 상대방을 소유하거나 조종하거나 통제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먼저 완전한 독립적 개체로 거듭나야 상대방에게 간섭하지 않고 상대방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지지하고 응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먼저 그 사람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 사람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의 보호와 책임은 맹목적이며,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이해는 공허할 뿐이라고 프롬은 말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 대해 어떤 것을 알고 싶어 할까? 프롬은 그 사람의 본질, 즉 그 사람의 근원적 심리 상태와 성향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공감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한편, 타인에 대한 지식은 타인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하는 욕구와 밀접하게 관련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비밀을 알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타인을 죽을 때까지 고문하거나 정신적으로 예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타인을 파괴하는 것일 뿐, 타인의 내밀한 본질까지 다가갈 수는 없다. 타인을 고통스럽게 할 수는 있지만, 타인의 영혼까지 다가가 들여다볼 수는 없다. 마치 어린아이가 벌레를 해체해도 벌레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방법인 사랑이 필요하다. 프롬에 따르면,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는 것이고, 이러한 침투를 통해 알려고 하는 나의 욕망은 합일에 의해 만족을 얻는다.”(p.50) 그러므로, 타인과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타인과의 합일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사고에 기반한, 인간에 대한 이론적 지식과 타인과 자신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 기반이 된다. 그러나 이는 직접 행위로써 사랑을 하는 것을 넘어설 수 없다. 이에 대해 프롬은, 현대 신학이 신에 대한 합리주의적 기술을 시도한 끝에, 신의 존재를 그저 수용하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설명하며, 신성(神性)과 사랑이 공히 인간의 이성이 아닌 직관과 관념의 영역에서 수용된다고 설명한다. 즉, 사랑과 믿음은 모두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며,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랑의 핵심 요소인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상호 의존적이다. 그리고 이는 성숙한 인성을 지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프롬은 말한다. 정신적으로 충분히 성숙한 인간만이 사랑하는 대상을 ‘자발적으로’ 책임질 수 있고, 자신의 문제를 상대방에게 떠넘기거나 상대방을 바꾸려 하지 않고 사랑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으며, 자신에 대해 온전히 알고 타인의 감정과 마음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상대를 진정으로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프롬이 서두에 말했듯, 퍼스낼리티(personality) 전체가 생산적 방향으로 발전한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프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성숙한 인간, 곧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휘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차지하려고 하고, 전지전능이라는 자아도취적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p.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