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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일단 내가 똑바로 서야 한다. 그리고 남을 일으켜주는 것이다.

by 독자J

p.36~41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슬프고 안타깝게도, 사회와의 합일도, 노동도, 오락도 인간의 근원적 한계인 분리와 고독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다. 부분적으로만 가능할 뿐이며, 창조의 경우에는 특수한 조건이 붙기 때문에 그 수혜자는 소수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노동을 할 수밖에 없고, ‘기성품’인 오락을 즐길 수밖에 없는 형편인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독과 분리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프롬은 사랑만이 완전한 해답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인간과 인간의 융합을 말한다. 프롬은 타인과 결합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갈망이며, 이것이 충족되지 못한 인간은 발광 또는 파괴-자기 파괴 또는 타인 파괴-행위를 벌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인간과 인간의 결합이기만 하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끼리의 결합 중에서도 특수한 경우만을 사랑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프롬은 전자의 경우를 공서적(共棲的) 합일이라는 언어로 규정한다. ‘공서적’이라는 말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태아와 어머니의 결합은 서로 다른 두 존재의 결합이지만 두 존재는 하나이다. 공서적 합일에는 수동형과 능동형의 두 가지가 있다고 프롬은 말한다. 수동적인 공서적 합일은 복종, 피지배 또는 피학대 음란증(masochism)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이 복종하는 대상의 일부가 됨으로써 고독감과 분리감으로부터 도피한다. 그러므로, 마조히스트적 인간이 복종하는 대상이 지닌 영향력은 그에게 한해 무한대로 커진다. 세계이자 우주가 되는 것이다.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러한 마조히스트들은 독립적 인격을 갖지 못하고 예속되어 있으므로 불안하지는 않지만 본질적으로 미성숙하다. 어린 양과 같은 존재이다. 프롬은 이러한 마조히즘을 종교적 우상숭배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며, 종교뿐만 아니라 세속적 관계에도 이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에는 정신적 복종에 더해 성적 복종을 포함한 육체적 복종도 가능할 수 있다.


한편, 능동적인 공서적 합일은 지배, 통제 또는 가학적 음란증(sadism)을 말한다. 피학적 음란증자들과 달리 이들은 타인을 자신의 도구로 삼아 자신의 불안과 고독으로부터 도피하며, 마조히스트들에게는 무한대의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사디스트들이 마조히스트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며 통제하지만, 양자는 상호 의존적이다. 악어와 악어새이며, 뱀의 꼬리와 머리이다. 사디스트들은 마조히스트들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마조히스트들은 사디스트들에게 빌붙어 살아간다. 즉, 이들은 지배-피지배의 관계일 뿐, 다른 대상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같다. 따라서, 한 사람이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가질 수 있다. 프롬은 히틀러를 예로 드는데, 그는 독일 국민들에 대해서는 사디스트였으나, 본인보다 더 큰 힘(운명, 역사, 자연 등) 앞에서는 마조히스트였다. 이런 면모로 인해 “그의 최후-전반적 파멸에 직면해서 자살한 것-는 그의 성공의 몽상-전 세계 지배-과 마찬가지로 특징적이다.”(p.38)


미성숙한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되는 ‘성숙한’ 사랑은 ‘자신과의 통합성’ 즉, 개성을 유지하고 정신과 육체를 온전히 본인의 의지로 통제하는 상태를 전제로 한다. 프롬에 따르면 진정한 사랑은 각자가 각자로서 온전히 존재하고,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 하며, 서로에게 과도하게 의지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그 자체로 인정할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 이런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결합하지만 정신은 하나인, ‘정신적’ 공서적 합일의 상태가 가능하다. 마치 태아와 어머니처럼 말이다. 프롬의 말을 보자.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p.38)


그렇다면, 사랑은 ‘하는 것’인가? 아니면 ‘빠지는 것’ 인기? 이에 대해 답하려면 ‘활동’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활동’이란 에너지를 소비하여 기존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일을 하든,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운동을 하든 모든 활동은 외부 목표 달성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기’이다. 같은 활동이라도 뭔가에 쫓겨서, 급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과 본인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활동에 대한 조금 다른 정의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감정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스피노자는 감정을 능동적 감정(행동)과 수동적 감정(격정)으로 구별했다. 능동적 감정을 표현할 때 인간은 자유로우며 자기감정의 주인이 된다. 하지만 수동적 감정을 표현할 때 인간은 쫓기고 자신도 모르는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즉, 활동은 외부 상황과 무관하게 인간 본인의 타고난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정의에 비추어보면, 사랑은 활동이며 인간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고, 이는 본인의 의지로만 이루어질 뿐, 강제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며, 진정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에 대한 일반적 오류가, 준다는 것이 무언가를 포기하고, 빼앗기고, 희생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시장주의자들은 받는 것 없이 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으며, 무조건 수용하거나, 빼앗거나 저장하는 것을 지향하는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온전히 준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프롬에 따르면, 성격이 비생산적인 사람들은 주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여긴다. 속이 텅 비어 있어서 박박 긁어야만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들 대부분은 주기를 꺼린다. 어떤 사람들은, 비록 주는 기쁨은 모르겠지만, 주는 고통 때문에 주기를 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주기도 한다. 손해 보고 사는 게 낫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이들에게 희생은 미덕이다. 이에 반해, 성격이 생산적인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곧 자신의 표현이자 자기 효능감의 경험이며, 자신이 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기쁨을 만끽하는 순간이다. 물이 가득 차서 끊임없이 퍼내야만 하는 화수분 같은 사람들이다. 프롬에 따르면, 이들은 “나는 나 자신을 넘쳐흐르고 소비하고 생동하는 자로서, 따라서 즐거운 자로서 경험한다. 주는 것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p.41)라고 여긴다.


정리하면, 프롬이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란, 각자가 온전하게 똑바로 존재하고,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책임지며, 상대방에게 과하게 의존하거나 상대방을 착취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 수 있는 두 사람이 만나, 각자의 개성과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는 ‘활동’이다. 여기에는 철저하게 능동성과 자발적 동기만이 있으며, 서로를 위해 주는 기쁨에 충만해 있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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