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하나, 사랑을 제외하면.
p.32~35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차이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기피하는 이러한 현상은 평등의 개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종교적 맥락에서, 인간은 신의 자식이기에 그 자체로 신성하다. 또한 철학적 맥락에서, 인간은 각자가 고유한 개성을 지녔으며 한 명 한 명이 그 자체로 우주이다. 이는 인간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라는 목적주의적 인간관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평등관은 변했다. 프롬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의 평등은 ‘자동 인형의 평등, 개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평등’(p.32)이다. 즉, 그 자체가 모두 목적인 인간 간의 평등에서 자본주의 사회에 맞춰 규격화·동질화된 인간 간의 평등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프롬은 이를 ‘추상적’ 동일성으로 정의했는데, “같은 일터에서 일하고, 같은 오락을 갖고, 같은 신문을 읽고, 같은 감정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동일성을 의미한다”(p.32)는 것이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들을, 독립성을 지닌 존재보다는 자본주의적 양식에 맞는 삶을 사는 동질한 부속품으로 규정하고, 동질한 부속품으로서의 개인들을 평등하게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롬은 현대적 의미의 기계적 남녀평등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바라볼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프롬은 이러한 평등을 ‘차이가 제거된’ 평등이라고 정의한다. 남녀평등을 예로 들면, “여자는 이제 다른 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남자와 평등한 것이다.”(p.32) 남자와 여자는 고유한 특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평등한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동일한 삶의 방식을 누리고, 자본주의적으로 생각하고, 현대 기술 문명을 향유할 능력을 갖춘 존재로서 평등한 것이다. 즉, ‘아담’과 ‘이브’로서가 아니라, 인간 1과 인간 2로서 평등한 것이며, 이들은 모두 인간 3, 인간 4로 대체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프롬은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남녀 간의 양극성(兩極性)에 의한 성애도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의 관점을 빌리면, 오늘날 연애를 안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현대 사회가 이러한 ‘비개성화·몰개성화’된 평등의 가치를 이상적인 것으로 설교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사회화는 인간을, 공동체 내에서 마찰 없이 원활하게 일할 수 있도록 서로 동일한 원자적(原子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규격화된 상품을 생산하는 것처럼 규격화된 인간을 길러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준화 사회에서, 인간들은 전반적으로 큰 차이가 없게 되며, 작은 차이를 가지고 본인이 개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형의 일치는 개인이 지닌 근본적인 분리 불안을 해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쾌락적 합일보다 강렬하지도 않고, 엄격하고 냉정한 규칙과 엄정한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이다. 마약을 하고, 술에 빠져 살며, 쾌락적 성행위를 즐기는 것에 비하면 사회의 관습, 문화, 규칙에 따르는데서 오는 안도감은 크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사회의 기준에 맞춰 열심히 살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본인의 자의식과 자아정체성이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힌다. 그래서 사회가 정해놓은 길을 열심히 따라가도 행복하지 않으며 마음 한편에는 공허함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형의 일치에서 오는 쾌락은 정신적이며, 육체적이지 않기에 만족감은 상대적으로 덜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인간의 본질적인 분리와 고독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극복하게 해 줄 수 없다. 일부 효과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인 노동과 오락은 어떨까? 프롬에 견해에 따르면, 당연히 분리와 고독에 대한 공포를 진정으로 해소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모두 ‘사회화’ 되었기 때문이다. 즉, 표준화되고, 동질화되고, 규격화되고, 평균화된 부속품들로 철저히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노동을 먼저 살펴보자. 현대인의 노동은 매우 규격화되고 정형화된 틀 속에서 움직인다. 일명 ‘매뉴얼’이다. 그래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조직이 시키는 일을, 지정된 기일 내에, 지정된 방식으로 해야 한다. 일을 위해서라면 표정, 말투, 감정까지도 연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게 매뉴얼에 있거나 고용주가 요구한다면. 그 대가로 받는 것이 급여이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철저하게 고용주들의 자아와 이익 실현을 위한 도구이다.
오락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인들의 오락도 특별하지 않다.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쉬는 일반적인 틀 속에서, 쉬는 날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르는’ 것뿐이다. 대부분은 돈을 내고 구매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는 영화관이 걸어놓은 것을 구매하는 것이고, 게임은 게임 회사가 만든 게임과 아이템을 구매하는 것이다. 쇼핑, 독서, 관광, 미식, 스포츠 등도 큰 틀에서는 비슷하다. TV나 OTT도 마찬가지이다. 프롬의 말을 빌리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월요일부터 다음 월요일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활동은 일정하고 기성품화되어 있다.” (p.34) 고된 노동을 잠시 잊게 해주는 단비와도 같은 오락조차도 이렇다면, 당연히 모든 인간은 본질적인 고독과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그리 간단히 해소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살면서도 자신의 삶의 방향성에 대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번뇌하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프롬은 말한다.
이러한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은 인간이고, 특이한 개인이며, 희망과 절망, 슬픔과 두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무(無)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단 한 번 살아갈 기회를 갖게 된 자임을 잊지 않을 것인가? (p.34)
사회 또는 집단과의 합일도, 노동도, 오락도 아니라면 창조 활동은 어떨까? 프롬에 따르면 이것은 고독과 분리로 인한 두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단,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속도로, 원하는 만큼 만들 수 있다면 말이다. 이러한 창조 활동은 창조자가 대상에 대한 강한 일체감을 느끼게 하여 고독과 분리감을 해소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말하자면, ‘진정으로 내 것이다!’라는 마음이 생기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위에서 말한, 철저하게 노동자와, 노동자가 작업한 대상이 분리되는 현대적 노동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프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종류의 창조적 작업이든 창조하는 자는 외부 세계를 나타내는 자료와 결합한다. 목공이 책상을 만들든, 금세공인이 보석 조각에 가공을 하든, 농부가 곡식을 기르든, 화가가 그림을 그리든, 모든 형태의 창조적 작업에서 일하는 자와 그 대상은 하나가 되고 인간은 창조 과정에서 세계와 결합한다. (p.34)
그리고 그들이 만든 창조물을 대부분의 몰개성적 현대인들이 노동의 대가로 번 돈을 주고 구매한다. 프롬의 견해에 따르면, 가수들의 음악을 듣는 것은 진정한 오락이 아니다. 기성품을 구입하는 것이다. 대중들은, 아티스트가 혼을 담아 열심히 고독을 해소하고 남은 것을, 기성품으로서 구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