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중간 정리: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고, 사랑으로 살아간다.
사랑은 인간의 존재론적 고독과 분리를 극복하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매우 숭고한 의미를 지니지만, 프롬에 따르면, 인간은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사랑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왜 이런 오류에 빠지는가? 첫째, 사랑의 문제가 ‘사랑받는’ 것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외모, 재력, 사회적 지위, 명성 등에 집착하게 된 데에는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 깔려있다고 프롬은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 사랑받는 것은 인기와 성적 매력의 척도로 인지된다. 그러나, 프롬에 따르면, 사랑은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이지 ‘사랑받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둘째, 그 사람이 사랑할 만하면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현대 자본주의적 교환 관계가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프롬은 말한다. 등가 교환이라는 원리가 인간의 인식 속에 깊이 침투하면서, 인간관계에도 등가 교환이 성립한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로써 현대인들은 자신을 보다 잘 ‘포장’된 ‘상품’처럼 만들어 ‘관계 시장’에서 ‘선택’되는 데에 사력을 다 하게 된다. 셋째, 사랑의 시작과 지속을 혼동하며, 지속보다는 시작에 큰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아름다운 시작에는 환호하지만, 그것의 지속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프롬이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p.17)라고 말했듯, 사랑의 시작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인생도, 사랑도 모두 시작과 끝이 있는 선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출발 지점에만 관심을 둘 뿐, 결승점과 과정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사랑을 시작하는 것 못지않게 잘 유지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하며, 끝내게 된다면 잘 끝내는 것도 중요하다.
인간은 왜 사랑을 갈망하는가? 그에 따르면, 인간이 아담과 이브로 나뉘면서부터 숙명적으로 지니게 된, 둘에서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근원적 나약함과 고독을 인식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짝을 찾는다는 것이다. 프롬에 따르면, 인간이 지닌 고독과 불안에 대한 ‘광적인’ 두려움은 개인과 집단의 행동 양식을 결정한다. 문명도 이와 비슷하다. 원시 문명일수록, 유아기일수록 어머니 또는 어머니 자연(Mother Nature)과의 결합을 추구하며, 원시 사회에서 나타나는 집단 성교를 통한 광희(狂喜)의 추구나 토테미즘, 샤머니즘 등도 이러한 경향을 잘 드러낸다. 인간도, 문명도 성숙할수록 점차 모성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 고독과 불안을 해소하려 하는데, 개인적 차원에서는 중독적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나며, 이보다 더 일반적으로는 집단의 문화나 관습에 적극적으로 동화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양자의 방식 모두 인간 본연의 실존적 한계를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다. 중독적 쾌락은 강렬하지만 일시적이고 피상적이기 때문이며, 사회와의 합일은 강렬하지도 않고, 냉철하며, 인간의 또 하나의 욕구인, 개성과 정체성에 대한 욕구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프롬이 지적한 바와 같이, 현대 사회는 인간의 독특한 개성과 정체성을 무시하고, 탈(脫) 개성화된 인간들을 길러내는 데에 주력하기 때문에, 인간이 지닌 또 하나의 욕구인 개성과 정체성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을 추구해도 인간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고 프롬은 설명한다.
노동과 오락도 마찬가지이다. 프롬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사회화는 인간의 개성을 박탈하고 사회의 부속품으로 잘 기능하게 훈련하는 과정이며, 이렇게 충실히 ‘사회화’된 인간들은, 자신의 노동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하게 시스템과 매뉴얼에 종속된다. 업무 방식, 기한, 생산물, 심지어 표정과 말투까지도 매뉴얼에 맞게 교정해야 하며, 그 대가로 급여를 받는다. 이로써 잘 ‘사회화’된 인간들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며, 오로지 고용주의 이익과 자아실현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오락도 현대인들의 정형화된 삶의 방식에 맞추어 ‘기성품화’된다. 현대인들의 오락은 노동일과 구분되는, 정해진 휴일에 할 수 있는 것들을, 자신의 급여를 지불하고 ‘고르거나 구입할’ 뿐이다. 창조적 노동은 이와 달리, 본인이 원하는 때와 장소와 시간과 대상과 양과 종류를 모두 통제할 수 있다면, 자아와 대상을 통합하여 인간이 지닌 근원적 고독과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러나 극소수만이 이러한 노동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프롬은 그 어떤 것이 아닌, 오직 사랑만이 진정으로 인간의 고독과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랑은 ‘성숙한’ 사랑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성숙한 사랑이란, 본인의 퍼스낼리티(personality) 즉 인성을 전체적으로 발달시킨 상태에서 가능하다. 본인이 먼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사랑은 누구에게도 예속되거나, 누구도 예속하지 않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상태가 전제되어야 하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줌’으로써 타인의 사랑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 사랑임을 이해해야 하며, 상대방과 본인 모두의 독립적 개성과 정체성을 유지하고, 그러한 상태를 서로 인정해 줄 때 가능하다. 이러한 성격을 프롬은 ‘생산적’이라고 규정했다. 즉,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 타인의 마음에 사랑을 일으켜 사랑하는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성숙한 사람은 자신 내부의 모든 정신적 측면들을 수용하고 통합하여 온전한 자아상을 만들어내며,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높여 타인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되며, 이를 바탕으로 타인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지지하며 그의 삶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응원할 수 있게 되고, 그 사람의 삶을 기꺼이 책임지고 문제를 같이 해결하려 함으로써 그 사람을 진정으로 보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두 성숙한 인격이 결합했을 때,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게 한다. 정신적으로는 새로운 자아를, 육체적으로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은 인간을 성장시키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자양분이다. 그러므로 프롬에 의하면, 진정한 사랑의 기술은, 성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타인을 유혹하거나 관심을 사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퍼스낼리티(personality)를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다.
한편, 성욕은 어떠한가? 성욕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프로이트가 말한 신체의 화학적 긴장과 욕구를 해소하는, 목마름과 배고픔을 해결하는 행위라고 생각되지만, 프롬은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는 성욕 역시 남녀의 양극성(兩極性)을 상호 합일을 통해 해소하려는 욕구이며, 본질적으로 인간의 고독과 분리를 없애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분석한 것처럼, 플라토닉 러브를 유지하기 위한 전 단계로서의 욕구 해소가 아닌, 사랑하는 과정의 중요한 일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 간에 성적 욕구를 느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성 간의 극단적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성 간에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프롬은 말한다. 남녀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형제자매 간에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웃 간에도, 친구 간에도, 사제 간에도. 인간은 사랑 없이는 죽는다. 그게 신이 인간을 설계한 의도라고 프롬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