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시작된 나의 마지막 일정
잠을 설쳤다.
긴장 때문일까, 아니면 기대 때문일까.
자꾸 눈이 떠졌다.
결국 알람보다 먼저 일어났다.
7시 반, 버스에 올라탔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진다.
이게 바로, 다섯 달의 마지막 아침이었다.
날씨는 완벽했다.
비도, 바람도 없었다.
모든 게 내 생각대로 흘러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난 이렇게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줄 몰랐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마라톤.
긴장은 되지 않았다. 아마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일것이다.
처음엔 일부러 속도를 줄였다.
잠을 네 시간밖에 못 자서 빨리 지칠 것 같았다.
그래서 첫 3km는 ‘그저 버티기’로 정했다.
하지만 코스는 평지였다.
그 덕분일까, 몸이 생각보다 가벼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앞질렀다.
마음이 조급했다.
그래도 나는 나를 믿었다.
지금것 해온 여러번의 실패와 나만의 페이스를.
새로 산 워치가 내 페이스를 지켜줬다.
7분 40초로 뛰려 했지만, 함께 달리다 보니 어느새 7분 10초.
불안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2km, 2.6km, 그리고 결심.
‘이제 페이스런을 시작하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보자.’
그때부터 오히려 내가 사람들을 앞서기 시작했다.
뒤는 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봤다.
그룹들이 생기고, 작은 경쟁들이 일어났다.
누군가를 제칠 때마다, 내 지난날 하나를 이겨낸 기분이었다.
그게 꼭 내 이야기 같았다.
조용한 역전의 묘미.
5km, 6km, 8km.
급수대에 사람이 몰려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다.
필요 없었다.
몸은 가벼웠고, 마음은 단단했다.
9km.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첫 기록을 1시간 안에 마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500m쯤 남기고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어폰을 빼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모든 걸 다 쏟아냈다.
그리고 골라인.
시계엔 1시간 2분 6초가 찍혀 있었다.
기록을 확인했다.
2110명 중 1579등.
웃음이 났다.
‘진짜 못 뛰었네’ 싶다가도 곧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그건 내가 진짜 달렸다는 증거였다.
나중에 알았다.
내가 연습하던 코스는 언덕이 많은, 난이도 높은 길이었다는 걸.
그곳에서 6분 30초도 힘들었는데,
오늘은 6분 12초였다.
그동안 쌓아온 시간들이 오늘 나를 밀어줬다.
기분이 좋냐고?
글쎄.
무덤덤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 무덤덤함 속에 어떤 평화가 있다.
오늘의 완주는 ‘끝’이 아니라,
다섯 달 동안 달려온 나 자신에 대한
조용한 ‘증명’이었다.
나의 대장정이 끝났다.
목표를 완성했고, 이 특별한 날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영화 I, Robot에서 주인공 로봇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졌으니, 나도 당신들처럼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찾아야 해요.”
그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땐, 그저 멋진 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들린다.
인간이란 참 재미있다.
누구는 자유의지를 따라 새로운 목적을 찾아 떠나지만,
누구는 다른 NS-5들이 컨테이너로 들어가듯,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포기한 채
안락한 반복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럼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나의 목적은 달성됐다.
5개월의 노력이 하나의 숫자로 증명됐다.
이제 나는 새로운 목적을 찾아야 할까?
아니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익숙한 리듬 속에 나를 맡겨야 할까?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오늘의 달리기가 내 안의 무언가를 깨웠다는 것이다.
그 깨달음이 나를 또 어디론가 데려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