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함을 잃어버린 것 같을때
얼마 전에 우연히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2000)을 다시 보았다. 오래 전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대략 이 영화의 줄거리가 이렇구나 정도로 딱 그 때의 나만큼의 이해를 했었다. 이제 23년이 지나 다시 이 영화를 다시 보니 감독의 어떤 의도와 더불어 한 사람의 삶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왜 그렇게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주인공이 절규하였는지 깨닫는 순간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완전 공감이 되었다. 나도 조금 어른이 된 것일까.
한 남자의 20대 청춘, 그 시절의 순수함. 그리고 그의 첫사랑인 윤순임이라는 여자. 착하고 선했던 이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삶과 점점 멀어지게 되면서 처음엔 타인에 의해, 나중엔 자신의 선택으로도 자신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고나서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윤순임의 순수함에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이 더렵혀진 자신의 손으로 매 번 원하지 않았던 삶의 선택을 하게 된다. 나쁘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그 시절, 폭력과 격동의 시간에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순수성에서 멀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의 순수하고 다정했던 손은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상담실에서 삶의 후회와 고통의 순간을 호소하는 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다. “만약 우리 인생 어떤 시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나요?” 각기 다른 대답을 하지만, 대부분 공통의 대답은, 큰 후회스러운 시점 즉 그 선택의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만약 그 때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나요?” 라고 다시 물으면, “.........” 대부분 주저하게 된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한다.
그 순간마다 나도 나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나는 언제로 돌아가고 싶을까? 지난 날의 삶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분들은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대략 나도 그렇다. 다시 돌아간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 때의 나는 여전히 미숙하고,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 알지 못한다면 큰 변화가 없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몇 군데의 어떤 시점이 있긴 하다.
고등학교 시절로 가서 좀 더 일찍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을것 같다는 것. 또 힘들어도 서울로 올라가 내 꿈을 위해 도전해보면 좋겠다. 그 당시 내 꿈은 연기자, 배우였었다. 결혼 이후라면... 우리 집 아이들에게 더 많이 사랑한다고, 더 많이 아껴주며 잘해주고 싶고, 우리 어머니께도 후회 없이 잘 보살펴 드리고 싶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생각을 하니 인생의 몇 군데 지점에서 부단히도 애쓰며 살았던 내가 떠올라 나의 힘겨운 어깨를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후회도 밀려온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후회 없는 삶은 없다는 것을. 조금 더 후회하는 것과 조금 덜 후회하는 것의 차이만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내일 조금 덜 후회하기 위해 그저 오늘을 최선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박하사탕에서처럼 그 때의 순수함이 내게서 찾아볼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를 지탱해주었던 순수함과 순박함이 내게서 사라졌을 땐 어떻게 해야할까. 세상 탓을 하며 독하디 독한 나로 사는 것이 맞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건 세상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는 일이다. 우린 언제나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았다. 그 때의 나의 선택이 가령 실수이기도, 미숙했을수도 있지만 우리 자신의 선택이 많았다. 내가 했던 선택은 타의에 의한 것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주체는 결국 나 자신이다. 오늘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할 용기와 책임이 있다. 그 선택은 언제나 내가 하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인간만이 자신의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했다. 그 또한 자유이자 동시에 책임이라고 하였다. 좀 더 나다운 선택을 오늘은 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내일 덜 후회하기 위하여 오늘 옳은 선택을 하기를. 그리고 선택의 책임 또한 받아들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