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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 다시, 호텔로 돌아오다

1995년생 신입사원과 2005년생 동료들 사이에서

by 하진

어쨌든 다시 살아가야 했다.
실망스러운 나라라고 불평만 하기에는, 사실 나는 호주에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일을 찾았다. 부동산, 스니커즈숍, 그리고 이번에는 호텔.


예측 불가한 나의 인생은, 30살을 앞둔 지금 다시 호텔로 나를 데려왔다.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미련 때문일까. 나는 호텔의 꽃, 프런트 데스크에서 일을 시작했다.


8년 전, 총지배인이 되고 싶다는 단순하지만 강렬한 꿈으로 호텔학교에 입학했었다.

하지만 코로나로 무너진 그 꿈은 늘 내 마음속에서 채우지 못한 공백으로 남아 있었고 이후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부동산 사업군에서 일하며 호텔과는 멀어졌다.

하지만 호텔은 언제나 “이루지 못한 나의 꿈”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나는 믿는다. 어떤 꿈이든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면, 결국 언젠가 다시 불러내게 된다고.

이번호주에서의 호텔 일은, 아마도 그런 불러냄의 결과였을 것이다.

나는 1995년생이지만, 지금 내 옆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2005년생이었다. 처음에는 현타가 왔다.

나 지금 이 애기들이랑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매니저급 직원들이 나와 비슷한 나이였고, 나는 이제 막 신입으로 일을 배우는 입장이었다.

내가 쌓아온 부동산커리어도, 내 나이도, 내 과거도 여기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다 지워지고, 나는 완전한 0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생각보다 강한 억양을 가진 호주 손님들을 응대하는 것도 버거웠고, 호텔 시스템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조차 희미했다. 내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현재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았다. 역시 나는 hospitality를 좋아한다는 걸.

부동산, 스니커즈숍, 호텔. 모두 직종은 다르지만, 사실 모든 일은 ‘사람을 상대하는 서비스’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을 돕고, 대화하고, 함께 웃으며 하루를 만들어가는 것.

그게 세상을 움직이는 방식이라고 나는 믿는다.


매일매일 다른 인종, 다른 배경의 사람들을 만나며 나는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었다.

호텔학교 시절 인턴을 시작했던 친구들을 보며 내 과거를 떠올리기도 하고, 영어가 서툰 한국인 손님들을 도와줄 때는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어머, 한국인이세요? 저 진짜 영어 못해서 체크인 걱정 많이 했는데 너무 감사해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나는 스몰토크를 좋아한다. 특히 세계 각지에서 온 손님들과 대화할 때면 할 말이 많아진다.

내가 살아온 나라만 해도 여덟 곳. 그 경험들은 지금 내게 가장 큰 무기가 되어준다.


여권을 보며 자연스럽게 말을 건넨다.
“오, 캘리포니아에서 오셨어요? 저도 10년 전에 캘리포니아에서 살았었어요!”
“프랑스에서 오셨네요? Bonjour! 저 작년에 파리에 있다가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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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손님과 가까워져 버린다. 그래, 바로 이거였다.

내가 hospitality를 원했던 이유.

누구든 자기 나라, 자기 삶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까?

나는 그 연결의 순간을 즐긴다. 내 과거의 삶은 단순한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람들과 이어지게 해주는 다리가 된다.


호주에서 호텔 일을 한다는 건, 내게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생계 수단이 아니다.
그건 지난 8년간 돌아 돌아왔던 나의 길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다.

나는 0에서 다시 시작했고, 어린 동료들과 함께 서툴게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hospitality라는 본질을, 다시금 뜨겁게 느끼고 있다.


30살 직전의 이 경험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건 내가 미뤄둔 꿈과 다시 마주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꿈은, 반드시 내 방식대로 완성될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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