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나무가 우는 걸 나는 보았네

by 한 올

울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약 울 수 없다면 아기는 어떻게 배고픔을 알리고, 아픔을 호소하고, 배설 후의 괴로움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아기는 태어남과 동시에 울음부터 배우나 보다. 우리들은 어떤가. 울 수 없다면 마음속에 남아있던 슬픔의 찌꺼기들을 무엇이 쓸어낼 것인가. 헤어짐의 아픔을 노래만으로 달랠 순 없지 않은가. 허무와 절망은 어떻게 덜어낼 수 있겠는가. 또, 친구가 고통으로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같이 울면서 고통을 나눌 수 없지 않은가. 여자는 어떻게 더 여리게 보이게 하며, 힘센 남자와 맞설 수 있겠는가. 울 수 있기에 더 크게 웃을 수 있다. 그래서 신은 우리에게 울음을 가르쳤고, 특별히 여자들에겐 다양한 울음들을 선물했나 보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생각들은 우리들이 늘 함께 해야 할 슬픔, 고통, 절망에서 조금 빗겨 서기 위한 생각들이다. 다만 작은 기쁨으로 작게 웃고, 보다 더 큰 행복감으로 크게 웃을 수 있다면 좋겠다.

가냘픈 여인이 우는 모습은 그녀를 더욱 가녀리게 한다. 강해 보이는 여자일지라도 그녀가 울고 있는 앞에선, 맹수같이 덤빌 듯 한 남자도 강아지처럼 꼬리를 내린다. 부모의 주검 앞에서 흐느끼는 딸들의 모습은 그 죽음을 더 슬프게 한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우는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다. 아름다운 여자는 울고 있어도 아름답다. 5 공화국 때에 아웅산 묘역 폭파 사건이 있었다. 대통령을 수행했던 많은 각료들이 죽었다. TV에서는 장례식 장면을 방송하였다. 장례식 후,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나무에 기대어 서서 울고 있었다. 해맑은 얼굴에 눈물이 두 볼에 흐르는 대로 두고 고요히 울고 서있는 모습이 차라리 아름답기까지 했었다. 사람들은 인재들의 죽음이 안타까워 슬픔을 이야기하면서도, 예쁘게 울던 그녀가 누구인가 궁금해하였고 정말 미인이라고도 하였다. 아름다움에 슬픔을 더하면 아름다움 이상인가 보다.

여자만 우는 것은 아니다. 남자도 운다. 여자는 눈으로 울고, 남자는 가슴으로 우는 것 같다. 여자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릴 때, 남자는 울음을 목으로 삼킨다. 남자는 일생에 세 번 운다지만, 한 번 더 우는 것 같다. 그것은 깊고 깊은 허무라는 늪에 빠졌을 때일 것이다. 남자는 울고 울면서도, 피를 토할 것 같은 허무를 끝내 뱉어 내지 못하는 것을 나는 보아 왔다.

사람만이 우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을 같이 할 때 내리는 비는 하늘도 울어, 흘리는 눈물일 것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황소가 큰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있다.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늑대는 사람이 되지 못한 절망에 밤하늘을 가를 듯이 울부짖는다. 갈대의 숲을 거닐어 보라. 갈대가 우는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는 까닭을 알 길이 없으나, 아마도 겨울이 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삶의 체험 현장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즐겨 보았었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이 사회를 지탱해 주는 삶의 원천이면서도, 가장 낮은 곳에서 온몸으로 일하는 분들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수년 전 여름 방학 특집으로 말레이시아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분들의 모습을 방영한 적이 있다. 그곳은 30미터가 넘는 나무들로 숲을 이루고 있는 벌목 현장이었다. 이 삶의 체험 현장을 유명한 연예인 부부가 함께 했었다. 그날은 특별히 수령이 백 살이 넘었다는 나무를 벤다고 했다. 그 나무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일하던 분들 일곱 명이 양팔을 벌려 그 나무 둘레를 둘러싸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나무의 키도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나무를 베기 위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연예인 부인은 일 하고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백 살이나 살아온 나무를 정말 베냐고 거듭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죄를 짓게 되었다며 하느님과 부처님을 번갈아 부르며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또 나무를 어루만지며 미안하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마침내 거목은 전동 쇠톱에 의해 밑동이 잘리어지고, 사람들은 힘을 모아 나무를 쓰러뜨렸다. 난 그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 큰 나무는 쓰러지면서 하늘도 울릴 만큼 큰 소리로 길게 울었다. 그 울음소리는 사람이 절규하는 소리와 똑같았다. 그 나무는 그렇게 울면서 삶을 마감하는 슬픔을 덜어냈을까...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백 년이나 지켜온 나무의 삶을 신도 아닌 인간이 끊어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리고 같은 인간으로서 부끄러움에, 나무의 죽음으로 인한 아픔에 눈물이 났다. 백 년을 참아 온 나무의 울음이 사람의 울음을 닮았으니, 인간도 백 년쯤 울음을 참아내면 신들의 울음을 닮을까? 그런데 신들도 우는지......

우리 인간들이 작은 슬픔으로 수없이 울 때, 가시나무새, 쓰러지는 거목, 도살장에서의 황소들은 일생에 가장 큰 슬픔으로 단 한 번 운다. 신이 인간에게 주는 절망 고통 운명이야 우리 인간들이 어쩌겠는가. 그로 인하여 우는 것으로도 우리는 많은 날들을 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또 우리가 자연에게 주어왔던 고통과 슬픔들은 거두어들일 수 있다. 우리들은 기쁜 일들만 주고받으며 살아가기에도 너무나 짧은 시간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사람들은 너무 기쁠 때도 운다. 우리들의 울음이 기쁨으로 인한 울음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울음들이라면 매일매일 이 세상을 울음으로 가득 채워도 괜찮을 것 같다.



나무가 우는소리를 들어봤나요?

백 살 된 나무가 쓰러지면서

땅이 울리도록 울더군요.

산을 지키지 못했다고

늑대가 우는소리는 들으셨나요?

백 년을 기다려온 울음소리를

밤하늘을 향해 울부짖더군요.

인간이 되지 못했다고

백 년을 참아 온 울음들이

사람의 울음을 닮았더군요.

남자가 우는 걸 보셨나요?

웃고 또 웃기만 하더군요

술잔을 비우고 비우며

큰 소리로 허허로이


인간이 백 년쯤 인내하며

울음을 참아내면

신들의 울음을 닮을까요?

그런데, 신들도 우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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