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by 한 올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휴대폰에서 피아노 선율이 애잔하게 흐른다. 노랫말 없이 연주되지만 여자의 머릿속에는 가사가 저절로 떠오른다. 휴대폰 홀더를 연다. 모르는 번호다. 여자에게 전화다운 전화를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스팸 메시지 거나 부동산 광고전화일 거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는다. 역시 부동산 광고 전화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다. 구로 디지털 역 근처에 오피스텔이 들어선단다.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할지 맞출 수 있다. 역세권이라 수요가 많은 곳이다. 투자하면 매월 월급을 받듯 월수입이 생긴다고 유혹할 거다. 여자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여자는 투자운운하며 기웃거리는 것조차 꿈도 못 꿀 처지다. 그래도 말을 끊지 않고 다소곳하게 다 들어준다. 어떻든 자신을 상대로 전화를 걸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무료한 시간을 메워주니 고맙기까지 하다. 언젠가는 반가운 사람에게서 전화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것을 놓칠까 두려워 언제나 휴대폰을 꼭 지닌다. 하긴 일 년에 한 번쯤 설날 전후에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오기는 한다. 가끔 전화를 주면 안 되나. 자신도 동생에게 전화하지 않으면서 동생을 원망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오래전 일이다. 동생이 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며 전화요금을 내준다. 용돈 일부를 떼어주는 동생에게 미안하다. 다달이 전화 요금을 매개로 동생의 안부를 느끼고 있다.

통화가 끝난 전화기에 바탕 화면이 뜬다. 액정 화면 속 여자는 앳된 웃음을 날리며 진달래꽃들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여자의 뒤편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화면 속 풍경은 가을이거나 겨울에도 언제나 봄이다. 그곳에 서있는 여자는 늙지 않는다. 여자는 화면 속 여자를 한동안 본다. 어느 봄날에 찍은 사진이다. 저런 봄날이 있었지. 곧 바탕화면은 절전모드로 인해 사라질 것이다. 이내 긴 숨을 내쉬며 휴대폰 홀더를 닫는다. 흰색 휴대폰은 누르무레한 상아색으로 변해있다. 여자의 누런 이빨 색과 닮았다. 여자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지 50년이 넘었다. 밥은 못 먹어도 커피는 굶지 않았다. 그래서 이빨이 누렇게 물들었는지 몰랐다. 휴대폰을 바꾼 지 한 7년쯤 되어가나. 그것도 가물가물하다. 대리점에 근무하는 청년에게 부탁해서 이것저것 세팅했다. 벨소리는 여자가 좋아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 일부를 세팅하고 싶었다. 여자가 청년에게 분명 그렇게 말한 것 같은데 다음날 휴대폰에서는 ‘봄날은 간다,’가 흘러나왔다. 여자가 청년에게 봄날을 간다,라고 말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곡명을 말했을지도. 봄날은 간다가 피아노로 연주되는 것을 보면 어느 부분에서 피아노라고 말했던 모양이다. 했던 말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늘나라에 간 어머니가 좋아했던 곡이다. 젊은 날에는 어머니가 그 곡을 부를 때면 눈총을 주곤 했었다. 나이 들어가면서 어머니처럼 그 노래에 친근감이 생겼다. 다시 세팅해 달라고 하려다 그만두었다.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 모든 것을 망각해갈 때마저도 그 노래는 잊지 않고 흥얼거렸다. 전화기에서 곡이 흐를 때마다 어머니가 따라 부르며 들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젊은 날의 기억들은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오히려 어제나 그제나 몇 년 전의 일은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가까운 것들을 자주 잊는다. 날이 갈수록 그 빈도가 잦다. 여자는 치매에 걸릴까 두렵다. 어머니의 모습이 영상처럼 남아서일 거다. 점심을 안 먹은 것이 생각난다. ‘연분홍~’ 어머니가 좋아했다는 것도 떠오른다. 조금 있으면 벨이 울릴 것이다. 매일 12시에 알람이 울리도록 세팅했다. 이런저런 일을 기억하니 치매는 아닌 것 같아 안도한다. 12시에 알람 신호음이 울리면 밥을 먹기로 했다. 하루 한 끼만 먹어도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한 끼라도 꼬박 챙겨 먹으려고 자신과 한 약속이다. 배고픔은 느껴지지 않고 목마르다. 물을 향한 목마름이 아니라 커피 향이 콧구멍 속으로 돌진해 온다. 커피를 마시노라면 12시가 될 거다. 마신 후 밥을 먹자. 돈이 남아있을까.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 열어본다. 지폐가 들어갈 자리에는 영수증 조각들이 자리하고 있다. 지갑 깊숙한 곳에는 2달러짜리 지폐가 한 장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눌 수 있는 행운의 선물>이라고 인쇄된 카드 안에 코팅되어 끼워져 있는 지폐다. 몇십 년 전 장이 준 선물이다. 1960년 상류사회,라는 영화에 출연했던 그레이스 켈리가 남자배우로부터 2달러 지폐를 선물로 받은 후 모나고 왕국의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이 지폐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속설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2달러짜리 지폐를 샀다고 했다. 상대가 자신이라던 장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그 2달러짜리 지폐는 돈이 아니다. 여자가 가지고 있는 보물 1호이다. 달러 외엔 하나같이 모두 커피를 산 영수증이거나 식권이다. 지갑 안의 지퍼를 연다. 동전이 손에 잡힌다. 크기가 큰 것으로 보아 5백 원짜리가 섞여있다. 족히 서너 개는 넘을 것 같다. 5백 원짜리 동전 세 개와 100원짜리 동전 3개를 들고 커피를 주문하러 간다. 제일 만만한 게 아메리카노다. 커피 메뉴가 한 가지만 있는 것처럼 매번 아메리카노만 주문한다. 무엇보다 값에 비해 양이 많아서 구수한 향을 오랫동안 음미할 수 있다. 혀에 감기는 느낌이 부드러운 것도 선택하는데 한몫을 한다. 카운터 앞으로 간다. 빨간 유니폼을 입은 아가씨가 주 문을 받는다. 구청에 근무하는 사람처럼 매일 출근하듯 오는. 오전 내내 죽치고 앉아있는 그녀를 여자는 알아본다. 당연히 무엇을 시킬 것인지도 알고 있을 거였다. 그래도 앵무새처럼 무엇을 주문하겠느냐고 묻는다. 여자는 혀를 굴려 아메리카노,라고 말한다. 가져가실 거냐고 묻는다. 여자가 한쪽 구석을 전세 낸 것처럼 차지하고 커피를 마신다는 습성도 물론 알고 있을 터였다. 여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동전을 내밀고 영수증을 받는다. 영수증을 지갑에 구겨 넣는다.

로고가 새겨진 하얀 머그잔에 커피가 가득이다. 컵이 담긴 쟁반을 종업원이 내민다. 쟁반 위에는 일회용 설탕과 크림, 냅킨용 휴지가 놓여있다. 여자는 휴지와 머그잔만 들고 테이블로 간다. 테이블 한편에 휴지를 놓고 그 위에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우아하게 앉는다. 여자는 짙은 베이지 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다. 세탁을 오랫동안 안 했는지 목과 소매 끝자락이 땟자국으로 새까맣다. 검은 깃 끝자락에 버버리 상징 체크무늬가 언뜻 보인다. 한눈에 버버리인 것이 드러난다. 테이블 위에 놓인 오크 색 핸드백 덮개 중앙에는 멀버리를 나타내는 멀버리 나무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 나무는 그리스의 지혜, 전술, 예술의 여신인 아테네에게 헌납되었는데 그리스신화에서 하얀색 멀버리 나무는 지혜를 상징한다고 했다. 상징성이 마음에 들어서 젊을 때 산 가방이다. 핸드백 손잡이는 대물려 사용한 것처럼 손 떼가 찌들 대로 찌들어 있다. 가방 몸체는 탈색되어 군데군데 희끄무레한 색이 드러났으며 튼 손등처럼 갈라져 있다. 올백을 한 여자의 흰 머리카락은 가는 철사처럼 뻣뻣하다. 한동안 머리를 감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찌든 명품으로 치장한 것과 때 낀 머리카락이 조화롭게 보이기까지 한다. 몸은 야위어서 어린이처럼 가벼울 것 같다. 여자가 검버섯과 주름이 가득한 앙상한 손으로 커피 잔을 든다. 힘에 부쳐 잔을 놓칠 것처럼 위태롭다.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이내 신문을 펼친다. 영문판 타임지다. 신문 전면에는 스티브 잡스의 타계 기사가 실려 있다. 한 달이 지난 신문이다. 검은색 터틀넥 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잡스가 아이폰 4 설명회를 했던 장면이 실려 있다. 신문 한 편에는 사과 한쪽이 베인 자리에 잡스의 옆모습을 조합한 추모 디자인 그림, 젊은 시절 볼 살이 통통했던 잡스의 모습이 실려 있다. 저 만한 인물이 주변에 있었다면 결혼을 진작 했을 거다. 여자는 혼잣말을 하며 안경집에서 돋보기를 꺼내어 쓴다. 기사를 하나씩 훑는다. 어떤 부분은 소리 내어 읽는다. 가녀린 몸에서 나오는 음색은 나이답지 않게 또랑또랑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를 흘긋흘긋 본다. 그들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70이 훌쩍 넘어 보이는 여자가 탄력 있는 목소리로 영자 신문을 읽고 있기 때문일 거다. 게다가 행색이 꾀죄죄하니 더 시선을 모으는 것 같다. 누가 보아도 뭔가 아귀가 안 맞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여자는 아직도 뭇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며 자부심으로 가슴이 부푼다.

여자의 눈은 신문 기사와 커피숍을 드나드는 사람들 사이를 번갈아 오간다. 기사의 내용을 다 안다는 듯 신문 읽기는 뒷전이다. 실은 신문을 읽는 것은 여자가 취하는 액션에 불과할지 모른다. 커피숍에 들어오는 사람을 눈여겨본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다. 여럿이 드나들지만 시선을 당길만한 노신사는 없다. 키가 자그마하고 미소년처럼 생긴 남자가 들어온다. 키가 160센티미터를 조금 넘었을 법하다. 눈이 또랑또랑한 게 총기가 있어 보인다. 걸음걸이가 활기차다. 자신만만한 저 모습은 영식 씨를 닮았다. 회사에 취직이 되었을 때 직속상관이었다. 노총각이었는데 얼굴은 동안이었고 여직원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여직원들은 그에게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불러주며 접근하기 일쑤였다. 재치 있는 말솜씨와 자신감 있는 당당함 때문이었다. 그는 사법시험에는 실패했지만 명문 법대 출신이다. 게다가 회사 오너의 아들이라는 프리미엄이 붙어있었다. 그가 동안이었기 때문에 나이 차가 많은 건 젖혀놓았다. 키 작은 것 하나가 걸리긴 했지만 장점이 많은 남자였다. 눈치 안채게 그에게 단순한 관심 이상의 관심을 가졌다. 여자도 회사 내에서 그에 못지않게 인기가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일을 하다 말고 여자의 어깨를 툭 쳤다. 짧고 뭉뚝한 엄지를 위로 들어 올리며 생뚱맞게 우리 남자들 사이에 최고,라는 말을 했다. 여자는 당연히 남자들의 상대자로서 최고라고 받아들였다. 그가 관심을 끌기 위해 미리 한마디 던진 거다. 여자는 그가 곧 프러포즈해오지 않을까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일하면서 오고 가는 사소한 말도 그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서일 거라 여겼다. 책 읽는 걸 즐기기도 했지만 그에게 지적(知的)이게 보이려고 책을 늘 끼고 지냈다. 여자는 짐짓 그에게 관심이 없는 체했다. 그런 채로 한 달여 지난 어느 날 그가 또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곤 카드를 내밀었다. 그건 그의 결혼을 알리는 청첩장이었다. 여자 혼자 그를 마음에 두었던 꼴이었다. 그의 상대는 여자도 익히 이름을 알고 있는 회사 농구팀의 스타급 농구선수였다. 결혼식장에 갔을 때 신부는 신랑보다 20센티미터 정도 키가 더 컸던 것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그는 입버릇처럼 어떤 조건이 아니라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고 말하곤 했다. 자손을 위해 키 큰 유전자를 제 일 항목으로 택했다고 여자는 그를 폄하하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위안했다. 한가한 시간이면 그의 결혼식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그를 비하시켜도 그에게 한 방 맞은 기분을 삭일 수 없었다.

사십 년도 더 지난 일인데 몸에 신열이 오르는 것 같다. 무언가 기분 전환할 일은 없을까. 낙서를 하던 약화를 그리든 하여야겠다. 여자는 핸드백에서 다이어리와 펜을 꺼낸다. 다이어리의 비어있는 페이지를 찾기 위해 한 장씩 넘긴다. 넘기다가 갈피에서 투명 셀로판지를 꺼낸다. 셀로판지 안에 오려낸 신문 쪼가리가 있다. 신문은 여자의 휴대폰 색깔보다 더 누렇게 바래있다. 오랫동안 보관해 온 듯하다. 신문에는 그레이스 켈리의 사망 기사가 실려 있다. 배우일 때의 사진과 왕비로 행복했던 모습,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부부와 찍은 사진, 죽기 전, 50대의 사진이 영화 필름 틀 안에 펼쳐있다. 자그마치 30년 전의 신문 조각이다. 신문지가 바스러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이다. 이런저런 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여자는 그 기사를 보게 된다. 늘 신문에 실린 사진에 눈이 빨려 들어갈 것처럼 본다. 젊은 날 여자의 별명은 그레이스 켈리였다. 그 기사를 볼 때마다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50대에 그레이스 켈리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올 백 머리 스타일을 했다. 여자도 50이 넘으면서 그 머리 스타일을 따라 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올 백 머리를 한 50대 그레이스 켈리와 같다고 믿고 있다. 여자는 거울을 애써 외면한다. 거울 대신 매일 머릿속에 간직한 50대의 모습을 비추어본다.

처음 입사하던 날 부서를 돌며 인사할 때,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보았던 남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자들은 그녀에게 직설적으로 말했었다. 도도하고 차가운 매력이 그레이스 켈리를 닮았다고. 눈처럼 하얀 피부, 호수처럼 맑은 눈, 기품이 우러나오는 우아한 모습을 지녔다고 했다. 여자는 남자들이 그레이스 켈리를 닮았다고 하기 전까지는 그녀에 대해 별반 아는 것이 없었다. 여자는 어렵사리 그레이스 켈리의 사진을 구했다. 지갑 속에 자기 사진인양 꽂고 다녔었다. 그 사진이 언제 어떻게 지갑에서 사라졌는지는 모른다. 그레이스 켈리가 갈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다는 것도 그 무렵 알았다. 그레이스 켈리가 여배우에서 모나코의 왕비로 신분이 바뀐 과정도 알아냈다. 현대판 신데렐라 그 자체였다. 여자는 남자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거칠 것이 없었다. 그레이스처럼 어쩌면 자신도 왕비에 버금가게 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부풀었다. 근거라도 대듯이 여자가 중학교 1학년 때에 꾸었던 꿈을 생생히 기억해 냈었다.

동화 같은 꿈이었다. 푸른 하늘에서 하얀 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구름이 가까이 왔을 때 그것을 보니 그건 구름이 아니었다. 학의 날개와 같은 모양이지만 깃털이 더 풍성한 날개가 달린 백마였다. 백마는 자신 앞에 무릎을 꺾고 머리를 조아리며 타라고 했다. 여자는 백마에 올라탔다. 백마는 여자를 태우고 하늘을 날아 황금빛으로 장식된 돔 건축 양식의 성에 도착했다. 여자는 성문에서 성안을 향해 깔려있는 붉은 카펫을 밟고 걸어갔다. 성 가장 깊숙한 곳으로부터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빛을 향해 걷고 있었다. 빛에 가까워지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감히 얼굴을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빛으로 된 사람의 형상을 한 신(神) 같은 분이 앞에 서있었다. 여자는 위엄에 눌리어 어느 사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검을 주었다. 여자는 한쪽 무릎을 세워 그 검을 받았다. 성문을 향해 뒷걸음으로 걸어 나왔고 대기하고 있던 날개 달린 백마를 타고 하늘을 날다가 꿈을 깼다. 시계는 밤의 한가운데인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자는 그 꿈을 꾼 후 형언할 수 황홀감으로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을 맞았다. 그리고 그 꿈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까 봐 아무에게도 꿈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삼 일간 참았다. 언젠가 어머니가 길몽은 삼 일간 지녀야 꿈이 헛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입이 근지러운 것 꾹 참고 삼일이 지난 후 어머니에게 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어머니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어떤 분야의 지도자가 되거나 영부인, 아님 그에 버금갈 부인이 될 운명을 지닌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서 꿈틀대곤 했다. 그에 맞게 공부도 잘하고 인격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서도 열심히 하고 어진 마음과 의젓한 태도, 따뜻한 가슴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여자는 꿈을 생각할 때면 행복했다. 또, 그 꿈은 여자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그 꿈이 떠오를 때면 책을 들었고 좋은 인격을 갖기 위해 인내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누구나 어린 시절엔 우주만큼 크고 아름다운 무지갯빛 꿈을 꾼다. 꿈은 언제나 이루어지지 않고 꿈으로만 끝나기 허다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나 통하는 말이다. 유독 자신이 꿨던 꿈은 유효하다고 믿고 살아왔다.

여자 못지않게 그 꿈을 믿는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느 날 어머니는 여자 앞에 하루 일과표를 내밀었다. 일과표에는 하교 후의 일정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피아노레슨, 발레, 웅변학원 등 어머니가 쓸 수 있는 돈은 모두 여자를 위해 쏟아붓는 것 같았다. 홀로 두 자매를 기르는 어머니는 여자를 위해 안 하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와 무언의 합의가 있는 것처럼 빡빡한 일정을 하나하나 열심히 해냈다. 동생에게는 공부를 못한다는 핑계를 들먹이며 대학 진학을 일찌감치 포기시키고 실업학교에 보냈다. 여자는 동생의 처지는 안중에 없었다. 어머니는 오로지 여자만 자식인 것처럼 대했다. 옷도 시장이 아닌 백화점 브랜드 옷만 입혔다. 어머니는 아무리 힘들어도 여자에게는 집안 청소며 설거지하는 일에 손끝도 대지 못하게 했다. 매사 명문가 아씨처럼 대했다. 어머니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자투리 일들은 동생 몫이었다. 여자는 열심히 공부만 했고 명문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한 살 터울인 여동생은 졸업 후 곧바로 취직이 되지 않았다. 눈높이를 낮추어 중소기업의 경리과 직원 채용에 원서를 냈지만 매번 떨어졌다. 어머니는 언니의 등록금에 보태야 한다면 동생에게 취업을 강요했다. 동생은 하는 수없이 시내버스 안내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말이 취업이지 해뜨기 전에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게 일상이었다. 비번인 날은 종일 잠만 잤다. 그런 동생을 보며 안쓰러워하기는커녕 코를 골며 자는 동생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동생은 버스 안내양 일을 하며 고단하게 번 돈을 언니 용돈이나 하라며 번번이 내밀었다. 여자는 처음엔 미안해하다가 종국에는 당연한 듯 받았다. 그 돈으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동생이 버스 안에서 시달릴 때 여자는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즐겼다. 물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동생에게는 졸업하고 번듯한 곳에 취직을 하면 더 이상 힘든 일을 하지 않게 하겠다고. 동창 중에 괜찮은 사람 소개도 시켜주겠다고, 빈 약속을 했다. 동생은 표현은 안 해도 그 약속을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고생시키지 않는 것은 몰라도 동생을 동창에게 소개해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버스 안내양인 동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창피했다. 동창들에게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좋은 곳에 취직되면 동생을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동생은 성실함을 인정받아 버스 회사의 경리과로 자리를 옮겼다. 용돈 받으며 공수표를 날린 셈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동생은 믿었던 언니를 저주할 만도 한데 꼬박 휴대폰 요금을 내주고 있다. 언젠가 지나는 말로 언니 잘못이 아니라 어머니 잘못이라 말한 적은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언니의 어느 구석이 예뻐서 전화까지 하겠는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여자가 홀더를 연다. 밥을 먹으라는 알람이다. 밥을 먹어야 한다. 이 알람을 들을 때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 같다. 알람은 3분 간격으로 3번 울리게 세팅했다. 처음에는 ‘식사하세요, 식사하세요,라고 세팅하려다 전화벨 소리와 같게 해달라고 대리점 청년에게 부탁했다. 하루에 한 끼 먹는 밥이지만 먹기 싫다. 밥 말고 차만 마시고 살 수 있다면 매일 이 번거로움에서 벗어날 텐데. 그뿐인가. 세상은 훨씬 더 살만한 곳이 되었을 거다. 범죄가 반 이상 줄었을 거고. 먹기 위해 쓰는 시간만큼 인생은 길어질 것이고 사랑을 나눌 여유도 배가 되었을 거다. 예술가가 만든 상상을 초월한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을 거다. 밥을 먹으러 가기 싫어 뭉그적거리고 있다. 두 번째 알람이 울린다.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처음 알람이 울릴 때 벌떡 일어나 밥 먹으러 간 적은 없다. 대부분 세 번째 알람이 울리면 마지못해 일어나곤 했다. 어머니가 즐겨 불렀던 ’ 봄날은 간다.’의 노랫말을 여자는 다 기억하지 못한다. 여자가 기억하는 가사는 연분홍으로 시작하는 부분, 꽃이 피면 부분과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의 세 부분이다. 3분이 지나면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가 의 멜로디가 흐를 것이다. 세 번째 알람이 울리기 전에 쇳덩이처럼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린다. 의자 옆에 놓아둔 유모차에 핸드백을 아이처럼 앉힌다. 유모차를 밀며 카페를 나온다. 여자는 지팡이처럼 유모차에 몸무게를 실어 의지하는 것 같다.

카페에서 나오자마자 여자는 검은 선글라스를 쓴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선지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인지 알 길이 없다. 여자는 아주 느리게 식당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다. 여전히 유모차를 미는지 기대며 걷는지 모호한 자세로 걸음을 옮긴다. 다른 유모차와 달리 차양은 없다. 아이가 앉았을 법한 의자만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누군가가 아이를 둘 쯤 키우고 또 다른 이가 유모차를 물려받아 또 두 명의 아이를 키운 다음 버려졌을 것처럼 낡을 대로 낡았다. 유모차 뼈대의 색칠은 벗겨져 군데군데 녹슬어 있다. 의자의 천은 아마도 짙은 감색이었을 텐데 빛이 바래서 황토색이 점점이 드러난다. 햇살에 드러난 여자의 얼굴에는 가늘고 굵은 주름이 가득하다. 콧등에도 주름이 졌기 때문에 얼굴에서 매끄러운 피부를 찾을 수가 없다. 궁핍한 삶을 살아온 표징인 듯하다. 눈 가장자리에도 조글조글한 주름이 가득할 터다. 눈 주변을 다 가릴 정도로 렌즈가 큰. 게다가 눈의 윤곽을 전혀 짐작하지 못할 만큼 색깔이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저렇게 짙은 렌즈를 통해서 앞을 볼 수가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다. 물론 여자의 눈이 어느 곳을 쳐다보는지 알 길이 없다. 여전히 유모차를 밀며 가진 것은 시간 밖에 없는 듯 해찰을 떨며 서서히 걸음으로 옮긴다. 유모차 안에는 핸드백과 먼지가 잔뜩 묻어있는 숄이 들어있다. 여자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고개로 보듯이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걷는다.

여자가 가던 걸음을 멈춘다. 제대로 볼 무엇을 발견한 것처럼 선글라스를 벗는다. 하얀 꽃잎이 떨어지고 있다. 앙상한 손을 내밀어 꽃잎을 받으려 한다. 떨어지는 꽃잎을 받으면 사랑할 사람을 만날 것 같다. 꽃잎은 여자의 손가락 사이를 비껴 떨어진다. 몇 번을 더 해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이젠 반사 신경이 예전 같지 않다. 한 손으로 모기도 낚아 채 잡았었다. 꽃잎을 잡으려다 균형을 잃고 잠시 비슬거린다. ‘지가 뭐 아직도 청춘인 줄 안담!’ 혼잣말을 하며 민망한 손을 거둔다. 또 한 잎이 내려오고 있다. 미풍에 실려. 여자가 이번에는 눈으로 꽃잎을 좇는다. 시선마저도 꽃잎의 속도에 따르지 못한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도둑맞은 것처럼. 여자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햇살이 눈부시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아름답다. 이 나이에 이르니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젊은이들은 한결같이 모두 미남 미녀들이다. 젊을 때에는 왜 눈에 보이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것들이. 여자는 고개를 좌우로 한 번 젓는다. 선글라스를 다시 쓴 다음 걸음을 옮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여자는 관내에 마련된 휴식 공간으로 간다. 등나무 아래 벤치가 ㄹ자로 배치되어 있다. 벤치를 둘러싼 아담한 정원에는 사계절 꽃을 번갈아 심어 놓았다. 마치 작은 공원처럼 꾸며져 있다. 벤치에 앉는다. 처음 기초생활 수급비를 신청하러 왔다가 관내에 있는 시설들에 반했다. 이곳에는 구민을 위한 카페, 도서관이 있고 민원실 안에는 군데군데 앉을 수 있는 안락한 소파와 방문객용 컴퓨터가 마련되어 있다. 하루를 보내기에 안성맞춤이다. 여자의 일과는 어제나 그제나 똑같다. 오전에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점심을 먹은 후에 이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책을 보고 싶으면 도서관으로 간다. 하릴없으면 민원실 소파에 앉아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본다.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다르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니 감상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게다가 행운이 따른다면 좋은 인연을 만날지도 모른다. 커피를 더 마시고 싶지만 오늘 쓸 돈은 다 떨어졌다. 한 달에 수급비 50만 원 정도 받으면 제일 먼저 한 달치 식권을 산다. 물론 구청 별관에 있는 식당 전용 식권이다. 일반 식당의 반값도 안 된다. 매일 식단이 바뀌는데 한 달 내내 김치 외에는 매번 다르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식권으로 하루 한 끼 식사를 한다. 토요일과 공휴일에는 1000원짜리 김밥이나 라면으로 해결한다. 다행히 기초 생활 수급자는 공과금을 많이 감면해 준다. 공과금을 내고 남은 돈을 한 달로 나누어 매일 쓸 돈만 가지고 나온다. 젊은 날에도 지금처럼 쓸 돈을 정해놓고 썼더라면 오늘날 이렇듯 초라하게 살진 않았을 거다. 햇살 아래에서는 따듯했는데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따뜻한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자판기 커피를 뽑을 동전은 있지만 그건 마시고 싶지 않다. 지나가는 젊은이들은 벌써 반팔 티를 입고 지나간다. 어머니가 한 여름에도 긴팔을 종종 입었던 까닭을 알겠다. 여자는 유모차에서 숄을 꺼내어 두른다. 따뜻하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햇볕에 앉아 잠시 잠들었나 보다. 벨 소리에 깼다. 홀더를 연다. 함께 즐겨보잔다. 이 스팸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상대방이 70을 넘긴 할망구인줄 알면 기겁을 할 거다. 여자는 오늘따라 심란하다. 벚꽃이 훌훌 날리는 것을 보아서일까. 또 봄이 가고 있어서일 거다. 한 번 장난이나 쳐볼까. 예는 1번 아니 오는 2번을 누르란다. 정말 처음이다. 오늘 같은 날은. 무조건 2번을 눌렀었다. 다음 어떤 멘트가 나올지 호기심도 발동한다. 1번을 누른다. 여자와 남자 중 어느 쪽이냐 묻는다. 남자는 1번 여자는 2번을 누르란다. 여자는 혼돈스럽다. 메시지 받는 쪽 성별인지 원하는 상대방 성별인지 알 수가 없다. 모르겠다. 1번을 누른다. 안내 메시지가 뜬다. 잠시 후 사진이 뜨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하란다. 선택하는 순간 전화요금에서 4천 원이 결제된다. 그리고 만난 후에는 별도의 요금을 상대방에게 지불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4천 원은 여자에게 큰돈이다. 기초 생활 수급자로 등록되어 있어 휴대폰 요금이 만 원 정도이다. 4천 원이 추가되면 만원이 훌쩍 넘게 나올 텐데. 어떻게 할까 망설인다. 동생이 떠오른다. 이번 한 번만 저지르자. 혹 괜찮은 남자가 눈에 뜨일지 모른다. 화면에 나타날 남자는 어떤 모습일까. 기대된다. 여자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여자의 가슴을 잠시 두근거리게 했던 남자가 하나 더 있었다. 장이다. 영식이라는 남자, 한 방 때리고는 해외지사 근무를 자청해 떠났다. 당장 눈에 띄지 않으니 곧바로 마음이 안정될 줄 알았다. 매일 얼굴을 맞대면 그자의 단점을 하나하나 끄집어낼 터였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아무리 못된 구석을 생각해 내려도 떠오르지 않고 가슴만 멍해졌다. 그때 회사 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여자가 장과 곧 결혼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정작 여자 자신은 그 소문을 가장 늦게 들었다. 그 소문을 들었을 때까지 장과 단둘이는 차도 마신 적이 없었다. 여자가 흥분해서 추적해 보니 장이 벌린 일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고 여자가 장을 불러내려 했을 때 장이 먼저 만나자고 했다. 장은 여자를 사랑한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 아씨처럼 받들고 살겠다, 등 온갖 마음 끌 말을 다 동원했다. 슬며시 탁자 위에 코팅된 2달러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행운의 2달러 이야기를 하면서, 여왕처럼 살게 해 줄 것이니까 자기를 만난 것 자체가 행운이라고 했었다. 여자는 장의 적극적인 대시에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이내 차가운 표정으로 그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 척했다. 그 상황에서 영식이라는 남자를 떠올렸다. 속물스럽게 둘을 비교해 보았다. 영식이라는 남자보다 더 나은 점은 키가 크다는 것뿐이다. 그것 한 가지로는 여자의 마음이 흡족해지지 않았다.

‘그래, 영식이라는 자가 못해낸 것이 있지, 그거야, 사법시험’

“사법시험 정도는 합격해야 되지 않겠어요?”

장도 같은 법대 출신이니 장의 약점일 수도 있는 부분을 건드렸다. 그래도 여자의 말이 자극제가 되어 장이 사법시험에 합격한다면 그리고 장과 결혼한다면 영식이라는 남자에게 여자도 한 방 날릴 수 있다. 장을 정면으로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시험에 합격하고 만나지요.”

장은 잠시 망설임도 없었다. 확신에 찬 말을 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 일이 있은 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그가 사표를 냈다. 송별회에서 그는 여자의 술잔에 술을 철철 넘치게 따랐다. 여자가 술을 입에 대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여자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다음날, 부서를 돌면서 인사를 마친 장은 여자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회사를 나갔다. 여자는 장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장의 뒷모습이 왜 쓸쓸해 보였는지. 그가 문을 나설 때 왜 가슴 한 편이 저려왔는지. 그게 사랑이었을까. 지금까지 의문으로 남아있다. 여자는 장이 퇴직한 이래 매년 사법시험 합격자 명단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었다. 장의 이름을 혹시 건너뛰었을까 두 번씩 보았다. 장의 이름은 없었다. 여자는 최대 5년까지만 기다려보기로 했다. 5년이 지나면 여자의 성 앞에 올드,라는 말이 붙을 것이다. 회사에서 올드를 붙인 채로 버티기 힘들어질 거고 그때가 되면 회사를 나올 생각이었다. 5년이 되는 해, 가슴을 조아리며 훑어본 명단에도 장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특이한 이름 덕분인지 동명이인도 없었다. 회사를 퇴직하고 나오면서 자신의 뒷모습을 쓸쓸하다고 봐주는 사람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던 일이 떠오른다. 장과의 스캔들 때문이었을까. 자신을 그레이스 켈리라거나, 최고라는 찬사를 늘어놓으면서 정작 데이트를 신청하는 남자는 없었다. 장이 유일했다. 퇴직한 후 2년을 더 사법시험 합격자 명단을 훑었었다. 장장 7년이었다. 포기할 햇수다. 그가 그냥 나타나도 받아 주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사람은 옷걸이에 불과하다는 말, 걸친 옷에 따라 옷걸이의 위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왜 장이 떠나기 전에는 몰랐을까. 하긴 모르긴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자신은 그럴듯한 남자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카페에서, 공원에서, 민원실 안에서 조차도. 영자 신문을 폼 내고 읽으면서.

여자는 휴대폰 화면에 나타나는 남자들 사진을 본다. 한결같이 애송이 청년들이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얼굴은 없다. 피부도 여자처럼 매끄럽다. 사진을 계속 다음으로 넘기지만 개성 있는 얼굴은 없다. 모두 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얼굴만 보면 손자뻘쯤 되어 보인다. 사진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손가락에 힘이 부쳐 더 넘기지 못하겠다. 잠시 멈춘다. 지금 무엇을 어쩌자는 건가. 이제는 이런 하찮은 세계에서조차 자신이 껴들 틈이 없다. 여자가 종료버튼을 누른다. 액정화면에 앳된 여자가 뜬다. 저 때부터 몇십 년이 흘렀다. 어제의 일 같은데 뭉텅 한 세월 떼어 내다 버린 것 같다. 그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것은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았는데도 말이다. 여전히 가슴 한편이 허전하다.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민원실에 간다고 외로움이 덜어질까. 달리 뾰족한 수가 현재로선 없다. 발길은 어느새 민원실로 향하고 있다.

민원실 소파에 앉는다. 다른 사람들은 민원창구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자신의 번호가 게시판에 뜨는지 지켜보고 있다. 여자의 눈은 민원실 출입구를 향해 있다. 들어오는 사람들은 여자를 흘끗흘끗 본다. 자신이 그레이스 켈리를 닮은 보기 드문 미인 이어서일까. 여자는 잠시 환상에 빠진다. 평생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살아왔다. 그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을 만큼 받는 것에 익숙하다. 매일 드나드는 사람은 바뀐다. 아는 얼굴을 만나고 싶다. 여자에게 그들은 잠시 스치는 풍경이고 그들에게도 그럴지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오지만 같은 얼굴은 없다. 똑같은 자세로 움직이는 사람도 없다.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아니다. 공무원들이 퇴근하고 난 후 한기가 들 정도로 썰렁해지면 여자는 민원실 밖으로 나왔었다. 오늘은 마음의 갈피가 잡히지 않고 심란하다.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겠다. 여자가 일찌감치 민원실 밖으로 나온다. 습관처럼 선글라스를 쓰고 관내를 한 바퀴 돈다. 드문드문 꽃잎은 아직도 떨어지고 있다. 여자가 꽃잎을 쫓을 생각을 않는다. 무심한 듯 땅에 떨어진 꽃잎을 본다.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 반대방향으로 한 바퀴 더 돈다. 아주 느리게 두 바퀴 돌았지만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 참 더디게 흐른다. 그래도 집에는 가기 싫다. 연립주택 지하 보일러실 한편을 개조해서 방으로 꾸민 공간이 여자의 집이다. 빛은 들어오지 않고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머리를 헤집는다. 그나마 집세가 점점 오르고 있어 언제 그곳에서도 내몰릴지 모른다. 그 공간에 몸을 밀어 넣기 싫다. 가족이 있다면 다를까. 퇴근할 때면 따뜻한 밥을 지어놓고 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골목에 들어서면 먼발치에 서있는 어머니의 실루엣이 보였다. 한 겨울에도 거르지 않았다. 미소를 머금고 서 있는 어머니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여자는 가까이 가서야 보았었다. 어머니가 미소를 짓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머니, 추운데 왜 나오셨어요? 같이 들어가요.”

“조금 있으면 오실 거야. 그 양반이.”

어머니는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골목 끝자락을 응시하며 한사코 기다렸다. 가끔은 ‘연분홍 치마가~’를 흥얼거리면서. 자신도 치매에 걸리면 어머니처럼 ‘봄날은 간다,’를 소리 내어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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