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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모 Aug 01. 2023

한국행 비행기

한국행 비행기

기차에 오르는 아들은 너무 신났다. 한 번도 기차를 타 본 적이 없다나 뭐래나. 3/4 사이즈 바이올린 케이스를 메고 폴짝폴짝 뛰며 보이는 창가 자리에 벌써 자리를 잡았다. 다린이를 제일 많이 옆에서 챙겨주는 셋째 누나 수린이도 바이올린 케이스를 벗어 머리 위에 올려놓고 캐리어를 무릎 앞에 놓고 나서, 내 등에 있는 비올라 케이스를 받아준다.


친정에서 한 달 지내는 동안, 악기가 없으면 마치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손을 묶어놓고 말하라고 하는 마냥, 자유롭게 숨 쉬지 못하고 24시간 마스크를 써야 하는 답답함을 피할 수 없다. 내 캐리어 안에 코로나 자가격리 시절 우리 집 근처의 악기수리점에서 별생각 없이 사고 연습하기 시작한 클라리넷도 들어있다. 악기들이 충분히 있다는 생각 만으로도 머리가 시원하다. 


무거운 캐리어를 밀고 가는 혜린이는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표정을 하고 있다. 한국에 우리와 함께 왕복여행을 하기는 하지만, 가자마자 월요일부터 벨기에 화학회사 한국법인인 솔베이의 R&I 센터에서 한 달간 인턴쉽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고생할 각오를 단단히 한 모양이다. 짐을 대충 한가찌게 밀어놓고 등짐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면서 다린이를 슬쩍 본다.


-        다린이는 좋겠어. 작년에도 한국에 갔잖아. 나는 한국에 안 가본 지 10년이야. 한국 가서 한국말이 잘 안 나올까 봐 무서워. 

-        언니 너무 걱정하지 마. 도착해서 한국음식을 몇 끼 먹고 나면 별 신경 안 쓰고 한국말이 술술 나올 거야. 


셋째 딸인 수린이는 말하는 게 항상 너무 어른스럽다. 어떨 때는 16세 소녀인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큰언니를 쿨하게 위로하는 마음을 고맙게 생각한다.


작년에는 둘째, 셋째, 넷째 이렇게 셋을 데리고 한국에 왔었는데, 뭘 했는지 하나도 생각이 안난다. 아직은 모바일 네트워크가 있으니 페북에 올린 몇 장의 사진을 돌아보며 기억을 더듬어 본다. 매일 하루살이처럼 사는 나는 매일 아침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어제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심지어는 내가 오늘 뭐를 더 해야 되는지, 핸드폰을 열어 캘린더를 수십 번씩 열어보면서 오늘 날짜 현재 시간 내가 해야 될 일들을 확인 하고서야, 이전의 내가 만들었던,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가 있다. 오늘 아침에 기차를 제시간에 탔으니, 첫 시작을 아주 잘했다고 나를 칭찬하고 있는 중이다.


-        엄마, 다 왔어요?

-        홍다린, 지금 몇 시인지 알아? 자 여기, 엄마 시계 봐봐.

-        아침 아홉 시 십분.

-        내일 아침 11시 30분에 인천공항 도착 예정이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자꾸 묻지 말아 줘. 

 

브뤼셀 공항에 잘 도착해서 출국장 안내판을 찾아가는데 누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다.

-        안녕?

-        오, 베네딕트!?

 

베네딕트는 매년 여름에 음악캠프에서 만나는 아마추어 첼리스트이다. 내가 피아노 반주를 했던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 까트린의 친언니다. 어렸을 때 자매가 각각 바이올린 첼로를 했는데, 나중에 결혼하고 의사로서 일도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여름방학때 음악캠프에 와서 일주일 내내 열심히 연습을 하고 앙상블 연주도 한다.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부모가 되어 이렇게 음악캠프에 손주들이랑 함께 와서 합주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뭐 대단한 조상이 된 것 같이 행복하다. 

 

-        식구들 다 어디가?

-        우리 친정에. 휴가동안 한 달 한국에 가. 너는 딸하고 둘이 어디 가는데?

-        안탈리아에 휴가차. 근데 올해도 음악캠프에 반주하러 올 거야?

-        한 주간 다는 아니고, 8월 9일에 벨기에에 도착하니까, 10일에 총연습 하고 11일 콘서트 같이 할 거야. 

-        그럼 그때 봐.

-        그래 잘 다녀오고, 캠프에서 봐.

 

핀란드 항공 체크인 데스크 앞에 줄이 엄청 길다. 넷이 줄줄이 끝에 섰는데, 이후 우리 뒤로 빠르게 줄이 늘어나고 있다. 뒤편에서 누군가 우리 쪽을 보며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사람이 또 있다.


-        지혜 안녕?

왕립음악원에서 플륫을 하는 학생이었는데,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잠시, 아이들에게 짐을 놔두고 뒤쪽으로 가본다.

 

-        아, 너도 헬싱키로 가는 거야?

-        음. 헬싱키 경유해서 중국으로 귀국해. 

-        왕립음악원은 다 마친 거야?

-        휴~ 다 끝났어. 논문도 마치고. 

-        축하해!!! 코로나 때문에 오랫동안 집에도 못 갔을 텐데, 잘 견디고 해냈네.

-        고마워, 너는 어디가?

-        한국에 친정에 한 달 갔다 오려고. 

 

벨기에에 오래 살긴 살았구나. 혈혈단신으로 떠나 23년을 지나고 나니 공항에서 그냥 마주치는 사람도 있고. 이제는 한국에서 알고 지낸 사람들보다 벨기에에서 만난 사람이 더 많아졌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얼굴을 안다고 그 사람을 아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전에 만났던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자연스레 함께 가진 공동주제를 찾아서 짧던 길던 대화를 나눈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은 반복적으로 이전의 기억을 현재에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타국은 기억 불모지다. 모든 것이 새로운 유럽생활을 시작할때는 한국에 있었던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로또 당첨 확률만큼이나 희박하다. 컴퓨터나 핸드폰을 바꿨을 때, 남아있는 사진 한 장 없이, 연락처에 전화번호하나 없이 비어있는 기억 초기화 상태라고나 할까.

 

어렸을 때, 나는 엄마에게 때때로 이렇게 묻고는 했다.

-        엄마, 나는 네 살 때 태어났지?

-        왜 그렇게 물어봐?

-        네 살 이전에는 기억이 안 나.

-        기억이 안 나면 안 태어난 거야?

-        어. 태어나서 살기 시작했으면 분명히 기억이 있을 텐데........

        

초등학교 1학년 시절, 3일 밤낮을 울며 불며 지낸 이 있다.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차에 치어 죽었는데, 강아지도 강아지이지만, 이로 문득 남에 일이 아니게 되어버린 나의 죽음이 두려웠다.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상상하기 조차 힘들어 흐느낄 때, 말없이 엄마가 꼭 안아주었다. 


그 당시 나는, 내가 60이 훨씬 넘은 파파 할머니인데 깊은 잠에 들어 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는 꿈을 꾸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이 60은 아직 쟁쟁한 아줌마인데, 그때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인생 마감시기라고 여겨, 백발에 휠체어에 앉아 졸고 있는 모습이 현실의 나일 것이라고 확신을 했드랬다. 


퇴근해서 늦게 들어와 집에 문을 여는 우리 엄마가, 진짜 우리 엄마를 잡아먹고 엄마인 척 하는 여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루를 꽉채워 지치게 살고 겨우 집에 들어온 엄마를 나름 심각하게 취조하여, 우리 둘만 알고 있는 비밀의 기억을 묻는 질문에 엄마가 정답을 내놓고 나서야 ‘아, 우리 엄마가 맞구나’ 하고 마음을 놓았다.


하늘에서 동동 떠 있는 이 시간은 마치 한국에서의 기억을 만나기 위해 공간이동을 하는 긴 터널처럼 느껴진다. 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엄마 아빠를 만나자 말자, 순식간에 다시 아이가 될 생각에 한참 들떠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지만, 언제까지나 엄마 아빠의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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