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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오름에 오르다

[제주 31일] 놀멍쉬멍 제주

by 여행하는 SUN

예전에 내가 처음 운전 할 때는 내비게이션이 대중화되지 않았었다. (겁나 나이 든 사람 느낌)

제주 여행을 많이 다녀본 탓에 길눈이 밝은 편인 나는 제주시내 골목까지 기억할 만큼 제주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동네 살다 보니 가는 곳마다 새롭다.

30일 동안 다녔던 길도 어느 날 내비게이션 없이 가다 보면 처음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남은 기간 동안은 동네에선 내비게이션 없이 이정표를 보고 다녀볼까 한다.

내가 못 봤던 새로운 모습까지 눈에 담아 가고 싶은 마음이다.





5시에 일어나 아이들을 깨웠다.

"일어날 수 있겠어? 힘들면 더 잘래?"

두 번 묻기 전에 벌떡 일어나는 아이들.

얼마나 이쁜지 모르겠다.

오늘은 높은 오름에 오르련다.

가는 길이 좀 험할 수도 있다는 정보가 있지만 가봐야 알 길이다.


하... 좀... 어렵다.

우선 입구 찾기가 어려웠다.

다른 계절에는 어땠을지 모르겠는데 미리 입구를 공부하고 왔음에도 풀들로 다 가려져서 그곳을 지나쳐 버렸다.

앞에서 5분 넘게 입구를 찾아 헤매다가 발견했는데, 온통 풀들로 덮여서 발자국도 잘 보이지 않았다.

날도 아직 살짝 어두웠다.

저 멀리 흐릿하게 계단이 보여서 '여기가 입구겠구나' 했다.

주변이 온통 공동묘지라는데 제주에선 공동묘지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옛날에는 먼 길을 가다가 산속에서 잠을 청해야 할 때는 공동묘지에서 쉬어 갔다고 한다.

조상들이 야생동물들로부터 보호해 줄거라 믿었기 때문이란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시간에 공동묘지 옆을 지나며 아이들에게 얘기해 줬다.

가는 길이 정비가 잘 안 되어 있다.

미끄럽지 말라고 깔아놓은 야자수매트는 다 해지고 고정해 놓은 쇠덩이들이 가는 길에 발에 자꾸 치였다.

방목하는 말들이 싸 놓은 똥들도 많아서 길을 잘 보고 걸어야 한다.

다른 오름들보다 많이 가파르기도 하지만 빠르게 오르면 15분 정도면 정상에 도착한다.

제주방송에서 일출을 찍으러 왔는지 카메라 두 대에 드론까지 날고 있었다.

구름이 갑자기 몰려와서 구름 위로 해가 떴지만 멀리 보이는 우도와 성산, 그리고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 수많은 오름들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바람은 또 어찌나 시원한지...

일출 보려고 급하게 올라와서 석균이랑 나는 토할 지경이었지만 올라오길 잘했다며 내내 얘기했다.

선명한 굼부리의 모습과 한가로운 말가족들의 모습, 시원한 바람과 여유로운 한 때.

정상 둘레길 한가운데 말가족이 서있는데, 길을 터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어쩔 줄 몰라하는데 상균이가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말만큼 온순한 동물이 없다며...

나도 석균이 데리고 조금 돌아서 지나갔다.

상균이의 의외의 모습이다.

오오오~~~ 많이 컸네.

제주에 있는 동안 더 많은 오름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속이 비어서 토할 것 같은 거라고...

집에 가서 밥 해 먹기엔 시간이 너무 걸리니까 그냥 편의점에서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2+1에 최적화되어 있는 우리.

컵라면도 삼각김밥도, 요구르트도 2+1.

컵라면은 두 개 먹고 하나는 집으로 들고 왔다.

비상식량이다.


집에 와서 샤워하고 잠시 쉬자고 했는데 나는 한참을 자고 아이들은 오전공부를 했나 보다.

다 끝난 석균이가 1층 소파에서 책 읽다 말고 잠들어 있었다.

이불 덮어주고 나는 점심을 준비했다.


하나로마트에서 사 온 떡갈비중 돼지고기로 두 장 굽고 세화오일장에서 사 온 브로콜리는 데쳐서 새우랑 볶아 밑반찬들과 맛있게 먹었다.

마지막 남은 부드러운 복숭아 두 개도 먹고,

어제 못 본 영어시험도 봤다.


동녘도서관에 가서 빌렸던 책들을 반납하고 이번엔 5권만 빌려왔다.

이사 가기 전에 반납하고 가야 한다.


오늘저녁은 피자를 먹자고.

야외에서 먹자고.

생각보다 세화에 피자 포장할 곳이 별로 없었다.

미리 전화로 주문하고 하나로마트 가서 마실거랑 김밥도 두 줄 사서 집 앞 해변으로 갔다.

파라솔을 펴고 의자를 꺼내고

우리 또 감탄사 방언 터진다.

"오~~"

"대박 시원해~"

"와~"

"너무 좋아~"

먹을 거 맛있게 먹고 오늘 빌려온 책을 읽다 보니 해가 지기 시작했다.

뭘 해도 영화 같은 이 장면들.

매일 이럴 수도 있구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구나 싶다.


상균이는 갑자기 땅을 파기 시작한다.

어느새 적극적인 모습으로 바뀌더니 땀을 뻘뻘 흘린다.

왜 파는 거냐 물으니 "그냥요" 란다.

남편에게 사진 찍어 보내주니

"지금 안 하면 내 나이에 할 것 같으니까 그냥 둬"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냥 뒀다.


집에 와서 또 다 같이 샤워하고 아이스미숫가루 한잔씩 마시고 오늘을 마무리한다.

내일 일정은 석균이가 계획한 하루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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