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39일] 진짜 휴가 시작
나는 무엇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정말 나의 힘으로만 올 수 있었을까.
정말 나의 의지대로 온 걸까.
돌이켜 보면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내가 아닌 주위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 친절해졌고 사랑을 준 사람들 덕분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 되었던 것 같아요. 싫어하는 사람들로 인해 관계를 정리했고 미움과 거부도 당하고 예쁨도 받으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나를 스쳐 갔고 다양한 감정들이 결국 나를 다스린 거예요..
인생이 늘 행복할 순 없었지만, 불행도 있었기에 행복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관계를 만들고 지나친 후에야 지금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러니 지금의 나를 마주하고 더 좋아해 주세요. 나와 함께한 많은 이들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작은 별이지만 빛나고 있어(소윤 에세이)' 중
성산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문구다.
오늘의 내가 있게 만들어준 주변 사람들을 찬찬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푹 자고 개운하게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식기류가 바뀌니 식탁 분위기도 달라진다.
성산집은 숙박업이 아니고 임대업으로 등록이 되어 있어서 살림살이가 한동스테이만 못하다.
조미료나 휴지, 세재 같은 기본적인 소모품들이 없다 보니 살림하다가 갑자기 막히는 부분이 있다.
아침 햇빛이 쨍 들어올 때 거실은 빨래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아이들 오전공부 하는 동안 나는 산책을 나서 본다.
집 뒤쪽으로 나가면 바로 코 앞에 성산일출봉에서 광치기해변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나온다.
오늘은 일출봉 쪽으로 걸었다.
오래간만에 이어폰 볼륨을 높이고 걷는 기분이 좋았다.
거친 모래 사이로 파도소리가 요란하게 음악과 섞이니 묘한 조화가 나를 업 되게 했다.
오늘 제주는 아침부터 폭염주의보가 내렸다.
온몸에 선크림을 바르고 나왔지만 익어가는 느낌이었다.
성산에서는 스타벅스에 갈 땐 꼭 걸어가기로 나 혼자 약속을 했다.
사실 그래서 걸어 나온 것도 있다.
제주는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카페가 많지 않다.
한 시간 넘게 스타벅스 성산점 2층에서 책을 보는데 거의 나 혼자인 시간이 많았다.
여유롭고 집중도 잘 되고...
오늘 책 선택이 딱이다.
12시 넘어 집에 오니 아이들 오전 공부가 끝났다.
남편 오기 전에 김만복에 가고 싶어서 그냥 애들 데리고 나왔다.
그런데 생각해 둔 아이들 메뉴는 솔드아웃이다.
그냥 김밥 두 개에 오징어볶음 시켰는데 생각보다 둘 다 잘 먹어서 다행이다.
그래도 맛있게 먹지는 않아서 추가 주문은 패스했다.
집으로 올라와서 아이스미숫가루 한잔씩 타 주고 과자 있는 거 더 먹었다.
성산일출봉을 오전에 갔을 때 보트 타는 곳을 봤다.
짧은 코스로 아이들에게 일출봉 아랫부분을 보여주고 싶었다.
짧지만 다이내믹하고 날씨가 좋아서 일출봉 봉우리도 더 빛을 발했다.
가마우지들도 많이보고 가마우지똥도 많이보고.
나와서 해녀들이 직접 잡은 소라랑 멍게 전복 파는 걸 봤는데 남편이 좋아하는 거라 눈여겨봤다.
지금 뿔소라 체취 금지기간이라는데 어떻게 파는 건지 궁금했다.
집에 오는 길에 횟집 사장님 말로는 다 두 달 전에 잡아 뒀던 거 파는 거라고 한다.
폭삭 속았수다. (속았다는 말이 아니고 수고하셨다는 뜻임)
계단으로 올라오는 길이 너무 더워서 주차장 입구 메가커피에서 아이들 음료 한 잔씩하고 돌아왔다.
남편이 순두부찌개가 먹고 싶다고 해서 하나로마트에 갔는데 없다.
여기는 지점이라 그런지 매장이 너무 작다.
아침에 남은 김치찌개는 부대찌개로 거듭나고 밥은 한 톨도 남김없이 다 먹었다.
남편 거 한 그릇 남겨두려 했었는데...
그냥 다시 밥 했다.
남편이 아슬아슬하게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나는 밥하고 감자찌개도 끓이고 아이들이랑 슬기로운 의사생활 2도 시청했다.
지코바 치킨 미리 주문해 두고 버스정류장까지 남편 마중을 나갔다.
일출봉 위로 해가 떠야 하는데 달이 저렇게 이쁘게 뜨면 반칙 아닌가?
거리두기 4단계라 그런지 10시를 훌쩍 넘긴 길 가는 너무 어둡고 적막했다.
가는 길이 조금 더 멀었다면 좀 무서울 뻔했다.
그래도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111번 버스가 도착해서 남편을 만났다.
오는 길이 고됐는지 퀭해 보이는 남편.
안쓰럽다.
얼른 델고 들어와 저녁 먹고 맥주도 한잔 마셨다.
일기 쓰는 지금 옆에서 코 골고 잔다.
우리 내일은 9시까지 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