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오늘도 '플랜. B'가 됐다.
하지만 더 멋진 하루, '아니었음 어쩔 뻔' 했을 그런 하루가 됐다.
하루가 참 길고, 가슴 벅차다.
새벽 3시에 알람이 울렸다.
어제 잡아 해감 시켜 놓았던 바지락을 몇 알 꺼내어 된장찌개를 끓이고 두 개 남은 소시지에 계란후라이를 하고 또 두 개 남은 새우튀김도 데워서 이른 아침을 먹었다.
오늘은 한라산에 오를 예정이었다.
집에서 성판악코스 매표소까지 50분 정도 걸려서 딱 5시에 도착을 했다.
우리는 미리 성판악코스로 예약을 해 둬서 큐알 찍고 들어가려는데...
석균이 샌들이 문제가 됐다.
앞 코가 막힌 등산화만 입장이 가능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
지난번에는 당연히 운동화였으니 몰랐었다.
돌이 많아서 발을 다칠 위험이 크다고 했다.
석균이 신발이 워낙 딱딱해서 쿠션 있는 스포츠샌들이 더 나을 거라 판단한 내 실수다.
양말로는 역부족이라는 직원의 말.
나는 너무 속상한데 남편은 쿨하게 다른 데로 가자고 한다.
백록담까지의 등반이 조금은 걱정스러웠던 석균이는 이때부터 헤벌쭉 웃기 시작했다.
밤하늘 별도 무진장 빛나고 구름도 예쁘고 바람도 시원하다며 목소리 톤도 높아졌다.
00:2
해 뜨는 시간을 감안해서 가까운 오름에 오르자는 남편이 붉은오름을 제안했다.
성판악매표소에서 20분 정도 걸리니까, 정상까지 오르면 딱 일출을 볼 듯했다.
내비게이션 찍고 갔는데 입구에서 헤맸다.
사려니숲 입구로 가서 다시 붉은오름휴양림까지 돌아와야 했다.
어렵게 입구를 찾았지만 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내가 제일 저질체력이다.
따라가기 너무 힘들다.
다행히 상균이가 뒤에서 계속 푸시해주고 응원해줘서 잘 가긴 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느리지 않은데 우리 집 남자들이 워낙 빠르다 보니 자꾸 뒤처진다.
6시 일출 시간보다 조금 늦게 정상에 도착했는데 몰려든 구름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태양이 구름사이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이스타이밍'이다.
한라산을 등반하며 먹으려 가지고 나왔던 오이며, 빵이며, 커피는 붉은오름 정상에서 먹었다.
붉은오름 굼부리 둘레길을 돌아 다시 입구로 하산.
내려오는 길에 노루인지 고라니인지랑 딱 마주쳤는데 살짝 숲길로 들어가더니 도망가지도 않고 나랑 눈을 맞췄다.
화장실 바로 앞에서도 딱 마주쳐서 여기가 정말 산속이구나 싶었다.
약 90분 코스라고 나와 있었는데 우리는 간식 다 먹고 한참 쉬다 내려왔는데 70여분 걸렸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온 가족 낮잠타임.
두 시간씩 푹 쉬었다.
자고 일어나니 출출해져서 떡볶이며 게를 잔뜩 넣은 라면이며 일단 먹었다.
남편이랑 상균이랑 서로 선크림 발라주기 하는데, 남편 강시 될 뻔했다.
남편 지인이 소개해준 '에곤카페'.
분위기도 좋고 강아지도 너무 귀엽다.
오랜만에 먹는 비엔나커피는 추억
돋는 맛이고 브라운치즈와 아이스크림이 올려진 크로플와플도 맛있다.
여기서 인당 2000원이면 맘껏 그림 도구들을 이용해 그리기가 가능한데 우리는 책보느라 패스.
남편은 섭지코지 쪽으로 산책 다녀오겠다며 나갔다.
그런 남편에게 문자가 왔다.
그랜드피아노가 있는 멋있는 레스토랑 사진 한 장.
딱 봐도 글라스하우스다.
여기서 작은 연주회 영상 찍으면 좋겠다고.
여기서 저녁 먹자고.
그렇게 우리의 멋진 저녁이 시작 됐다.
5시쯤 민트레스토랑에 가서 아무도 없는 레스토랑 홀을 우리만의 연주회로 채웠다.
석균이가 엄마에게 바치는 곡을 연주할 때는 눈물이 나서 혼났다.
자주 연주해 주는 곡인데 피아노가 달라서인지 공간이 달라서인지 훨씬 웅장하고 듣기가 좋았다.
30분 넘게 우리만의 연주회를 열고 코스요리로 저녁을 마무리했다.
아직 예식장 말고는 이런 코스요리가 처음인 아이들의 반응이 환상적이다.
식전빵을 3번 리필한 팀은 우리가 최초이지 않을까...
아마 오늘밤을 평생 기억할 것 같다.
2시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 글라스하우스가 조명을 받아 더 예쁘게 보였다.
구름이 많아서 노을도 못 볼 줄 알았는데 저너머 붉은빛이 저녁 산책하는 우리 마음을 더 흔들흔들하게 했다.
섭지코지 등대 위까지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부터 일어나 많은 일들을 한 것 같은데 낮잠을 자서인지 꼭 이틀은 걸려 일어난 일들 같다.
내일은 진짜 제주살이의 마지막 하루다.
또 어떤 새로운 일이 우리 추억을 만들어줄지 기대하며 푹 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