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아버님의 시간

인생에 다시 가고 싶을 시간들

by 여행하는 SUN

7.

2017년 10월 30일.

‘지극정성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님이 계속 설사를 하신다고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아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뵙기도 했는데 며칠이나 됐다고 부쩍 말라버린 모습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앙상한 몸집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냥 장염 정도라면 처방전 받고 바로 요양원으로 돌아가실 수 있다고 했는데,

“입원하시고 검사를 좀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의사 선생님.

예상도 못했었다. ‘폐렴’이라니. 요양원에서도 폐렴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식사하실 때 자주 사래에 걸리곤 했는데 그게 원인이 된 ‘흡인성 폐렴’이라고 했다. 장염 증세도 있지만 폐렴이 심각한 상태라고 했다.

남편은 아침 일찍 병원에 들러 아버님을 뵙고 출근했다. 저녁에 퇴근하고 나면 집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아버님께 다녀왔다. 나는 오전 10시부터 1시까지,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면회시간에 맞춰 아버님 곁을 지켰다.

아버님께서 입원한 병실은 중증환자들이 입원 중이라 24시간 간호사들과 간병인들이 상주하고 있고 면회시간도 제한된다. 하지만 아들의 지극정성을 알아서일까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 면회를 제지당한 적은 크게 없었다.

아버님은 기억력도 흐려지고 말씀도 어눌해지고 걷지도 못하셨다. 하지만 아직 귀는 잘 들려서 아버님 젊었을 적 이야기나 좋아하셨던 것들을 이야기할 때면 집중하는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님, 우리 집에 쌀이 다 떨어졌는데 쌀 사러 가야죠? 상균이 석균이 밥 해줄 쌀이 없어요.”

“가야지.”

병원에 입원하시고 첫 번째 재대로 된 대화였다.

“아버님이 가셔야 하는데, 기춘이 아저씨한테 가면 돼요? 전화 안 하고 가도 돼요?”

“해야지, 전화해야지.”

“아버님 지금 몇 살이시죠?”

“서른여덟.”

하아…… 이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었었다. 아버님은 젊어서 쌀장사를 크게 하셨다. 지역의 유지셨고 동네에서 ‘이하준 씨’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시집와서도 쌀은 꼭 시댁 근처 아버님과 함께 일하셨던 기춘이 아저씨네서 가져다 먹었었다. 그때를 기억하시고 그때를 이야기하시는 아버님. 할 수 있다면 ‘서른여덟’ 그때로 돌려보내 드리고 싶었다.

24시간 밝은 병실의 밤은 밤이어도 밤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진통제와 항생제로 낮동안 잠에 취해 있던 아버님이 저녁 8시가 넘어 눈을 뜨셨다.

“아버님, 음악이라도 들려 드릴까요? 배호 좋아하시죠? 들으실래요?”

유튜브로 ‘배호’를 검색하는데 가는 음성이 들렸다.

“조미미”

아버님이 젊었을 때 첫사랑이었다는 조미미 씨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이다. 가수가 되기 전에 아버님이랑 잠깐 만나셨다는데 가수가 되겠다고 이별을 했었단다. 그 조미미의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하셨다.



8.

여름휴가를 내고 남편이 제주로 내려왔다.

어제저녁에는 아이들이 잠들고 둘이 맥주 한 잔 할 곳을 찾아 나갔다. 제주는 번화가가 아니면 저녁 8시만 되어도 거리가 깜깜하고 조용해진다. 다행히 우리 집은 외도동에 있는 주택 밀집 지역 근처라 늦도록 하는 음식점들이 몇 곳 있었다. 우리는 해장국에 김치전, 막걸리를 마시며 떨어져 있던 시간들을 공유했다.

아침 일찍부터 아이들은 신이 나 있다. 제주로 내려오면서 ‘장난감은 자급자족’이라는 단 서를 달았었는데 덕분에 종이 접기로 로봇부터 동물까지 못 만드는 게 없을 정도가 되었다. 돌멩이나 나뭇가지도 장난감으로 변하고 조개껍데기도 멋진 작품으로 변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집에서 놀고 싶다는 아이들. 덕분에 나는 남편과의 데이트 시간을 벌었다.

집에 있을 아이들에게 미션을 남겼다.

1. 둘이 스스로 점식 차려 먹기.

2. 세탁기가 다 돌아가면 빨래를 잘 털어서 널어보기. (윗 옷은 옷걸이에 걸어서 넌다.)

3. TV는 한 시간만 본다.

점심이라고 해 봐야 후레이크 꺼내서 우유에 말아먹는 거지만 생각해보니 아이들이 스스로 냉장고 문을 열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믿고 데이트를 즐겼다.

막상 나오고 보니 시간대도 어중간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 중이었는데

“옥돔식당으로 가 봐요. 거기 줄은 서야 하지만 정말 맛있어요.”

하고 집주인아주머니가 추천을 해 주셨다. 4시면 문을 닫고 그 전에라도 재료가 떨어지면 문을 닫는다는 칼국수 가게. 여름 성수기에는 보말칼국수 단일 메뉴라고 했다. 도착하면 12시 전이니 먹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대기번호 27번’ 그래도 단일 메뉴니까 ‘회전율은 빠르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벽에 대문짝만 한 글이 쓰여 있다. ‘재개재개 다울리지 맙써!^^ (빨리빨리 재촉하지 마십시오)’. 주문하고 칼국수 나오는데 30분 걸렸다. 걸쭉한 국물에 유부가 많이 들어있고 보말도 까끌거리는 식감 없이 쫄깃하다. 적당히 삶아진 면이 입에 착 감겨서 먹어도 먹어도 자꾸 들어갔다. 온통 부드러운 이 칼국수에 함께 주는 콩나물을 섞어 먹으면 식감이 또 예술이 된다. 둘 다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남편의 보말 사랑은 여기서 시작 됐다. 그날 이후로 남편의 생일날엔 어김없이 제주산 보말을 넣은 미역국을 끓이고 있다.

사계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할까 하다가 송악산 근처라 둘레길 얘기를 했다. 며칠 전에 아이들과 둘레길을 걸었는데 늦은 시간에 출발해서 한 시간 반을 걸어 어두워져서야 다 돌 수 있었다고. 남편은 날도 흐리니 또 걸어 보자고 했다. 역시 둘이 걸으니 한 시간 만에 여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미션을 확인하는데 너무 기특하고 웃겼다.

점심도 잘 먹었고, 빨래도 자알……널었는데……, 가끔 두장 씩도 널려 있고 똘똘 말아서 걸어도 놓고 그 위에 펼쳐도 놓고. TV는 1시 29분에 켜서 2시 27분에 껐다며 한 시간 안 되게 봤다고 자랑했다. 참 순수하다.

오후 시간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물놀이를 한다.

우리가 자주 가는 곳 중 한 곳은 곽지과물해변이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메인해변이 아니고 그 옆 아담한 곳이 우리의 주 물놀이터다. 남편이 와서 짐 나르는 것도 쉽고 아이들과 몸으로 놀아주는 모습이 좋았다. 나랑 놀 때보다 깊은 곳까지 가서 파도타기를 즐기고 발가락을 꼬물거려 모래 속에서 조개를 찾아냈다. 엄마가 해줄 수 없는 남자들만의 승부욕과 탐험심과 자극들을 기꺼이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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