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여행의 타이밍

'제 삼자'인 며느리

by 여행하는 SUN

13.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마음이 급하다.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아버님 면회시간을 맞춰야 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이하준 환자 보호자 되시나요? 혈압이 자꾸 떨어지네요.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앞치마만 벗어두고 뛰었다. 다행히 병원은 큰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거리였고 도착했을 때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아마 약을 드시다가 또 사래가 걸렸던 듯했다.

“보호자님, 혹시 앞으로도 혈압이 갑자기 떨어지는 이런 응급 상황이 생기면 승압제를 투여해야 하는데 보호자분 동의가 필요합니다. 가시기 전에 서명하나 해주고 가세요.”

면회시간이 겹쳐서 나는 또 아버님 배를 쓸며 중얼거렸다.

“선미 손은 약손. 아빠 배는 똥배.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라. 우리 아빠 아프지 마라!”

응급상황에 아버님도 힘이 드셨는지 남은 시간 내내 깊은 잠에 빠지신 듯했다.

집으로 가기 전에 보호자 동의서에 서명을 하러 갔다. 환자와의 관계를 적는 난에 ‘며느리’라고 적자 간호사가 말했다.

“어, 며느리는 안 되는데요.”

“네? 며느리가 안된다뇨?”

“며느리는 보호자 서명이 안돼요. 아드님이나 아내분 안 계신가요?”

참 어이없는 일이다. 아버님의 주 간병은 내가 하고 있는데……, 나는 응급이어도 아버님의 일신에 관한 어떤 상황에도 보호자가 될 수 없다고 한다. 혹시 응급으로 수술을 하게 되어도 나는 수술을 해 달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며느리는 ‘제 삼자’였다.

결국 남편과 시댁남매들, 어머님까지 상의 하에 남편이 서명을 했다.

승압제는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까지 몇 번 사용하게 됐는데 응급상황을 벗어나긴 했지만 이게 과연 잘 한 선택 인지는 모르겠다. 승압제를 쓰면 혈관 수축을 위해 심장이 훨씬 많은 일을 하게 되는데 혈압이 오르는 동안 맥박수가 180~200까지 오르기도 했다. 완전히 지친 몸으로 100m 전력질주를 계속해야 하는 모양새였다. 승압제를 쓰고 나면 밤새 잠을 못 자는 날도 있었다.




14.

여행에는 분명 타이밍이 있다.

누구에게는 정말 환상적이었던 곳도, 그날의 분위기와 내 기분에 따라 그 환상적인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한다. 누구나 좋다고 말하는 그곳도 누구나 다 좋아할 수는 없다.

내 여행의 타이밍은 지금이 맞다. 주변에 보이는 환상적인 뷰와 새로운 설렘 때문만은 아니다. 언젠가 한 번씩 느꼈었던 엄마와의 교감, 좋은 걸 좋다고 충분히 말해 주시는 오늘. 행복한걸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해 주시는 오늘. 고마운걸 충분히 고맙다고 말해 주시는 오늘.

“우리 딸 사랑한다" 말해 주시는 오늘.

우리 엄마의 여행의 타이밍도 '지금' 이길 바란다.

어제저녁 처음으로 온 방에 에어컨을 끄고 잤다. 서늘한 기운마저 느껴져서 잠깐 보일러도 돌렸다.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어제 장 보며 곰국을 사 왔는데 오늘 아침 아주 고마운 한 끼가 되었다. 국만 먹기 서운해서 엄마께 정말 큰 콘버터를 구경시켜 드렸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라 28cm 프라이팬이 꽉 차게 콘버터를 만들곤 한다..

아침 간식까지 챙겨 먹고 엄마 손가락 소독을 위해 애월보건지소에 먼저 들렀다. 다음 주면 실밥을 빼니까 이번이 마지막 소독이다.

점심은 성산 쪽 고기국숫집. '호로록'. 고기국수가 유명하지만 우리는 모두 멸치국수를 시켰다는 거. 석균이만 고기비빔국수를 먹었다. 비빔국수가 내 취향저격이다. 돔베고기랑도 너무 잘 어울린다. 김밥은 1인 1 메뉴 시킬 때만 주문 가능하다. 우린 국수 4개 시켰으니까 가볍게 두줄만 시켰다. 계란말이를 크게 말아서 몇 등분해서 넣어 주는데 생각보다 사이즈가 크다. 멸치국수는 육수가 좀 부족하고 엄마는 면이 붇어서 식감이 좀 떨어진다 하셨다. 하지만 나는 '호로록'이랑 잘 어울리는 면발이라 생각했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빛의 벙커 모네, 르누아르, 샤갈 지중해 화가들' 전.

비 오는 날이라 사람이 많을 줄 알지만 엄마의 마지막날 이 전시를 함께 보고 싶었다. 나는 서울에서 고흐전을 본 적이 있는데 음향이나 스케일은 이번 느낌이 더 좋았다. 다만 사람들의 진행 방향이 전시를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라 어수선 한건 아쉬웠다. 별도의 공간으로 몇몇 화가들을 나누어 같이 전시를 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이 클림트, 고흐에 이은 세 번째 전시이니 다음에는 더 보완되기를 기대한다.

엄마도 아이들도 이런 식의 전시는 처음이라 눈과 귀가 호강했다. 어디 가서 사진 찍는 스타일은 아니신 엄마도 여기저기 특히 내 모습을 찍어 주시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새로운 경험도 하고 가서 너무 좋다고 말해 주시는 엄마. 그 말씀에 오늘 하루도 그냥 너무 좋다.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는 게 느껴져서 길게 있을 수가 없었다. 1시간 반 정도 한쪽 구석 의자에 앉아 감상하고 주변을 돌아 나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엄마, 제주에서 드셨던 것 중에 뭐가 제일 맛있었어요?"라고 묻자 망설임 없이 대답하신다.

“오름에 오르고 나서 먹었던 해장국!"

아침 일찍부터 아부오름에 오르고 아마 시장하셨던 탓에 더 맛있게 드신 지도 모른다. 내일 아침 비행기로 돌아가시기 때문에 동서네 해장국에 들러 소머리해장국 3인분 포장해 왔다. 제일 맛있었던 거 한번 더 드시고 가시라고.

냉장고에 뭐가 많은 것 같긴 한데 막상 하고 보니 별로 없었다. 엄마 좋아하시는 야채들만 가득 있다. 일단 브로콜리 많이 넣어서 새우구이 하고, 연두부에 양념장 올리고, 제주 냉동 오겹살 구웠다. 뭘 자꾸 뚝딱거리냐고 대충 먹자고 하시는 엄마.

“엄마, 내가 맘은 그게 아닌데, 엄마 생신상 한 번을 못 차려 드렸더라. 물론 같이 여행도 가고 가서 맛있는 거 먹기도 하고 그랬는데 내가 결혼하고 차린 생일상이 몇 번인데, 엄마한테는 한 번을 안 했더라고. 그게 맘에 걸렸어."

말하다 보니 울컥했다. 엄마도 아셨는지 밥그릇에 얼굴을 묻을 기세다.

아이들도 있고 해서 금세 분위기 전환하고 밥 많이 먹었다. 울 엄마의 황금변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