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폭우 아래 꼬인 덩굴

3부 여름: 덩굴의 계절

by 오소리

10장 〈폭우 아래 꼬인 덩굴〉

  하늘은 맑았지만 공기 속에는 묘한 습기가 섞여 있었다. 얽이의 잎사귀는 바람이 지날 때마다 미세하게 떨렸고, 아이들은 점심시간마다 텃밭으로 몰려와 방울토마토의 붉은빛을 세어보았다.
  “선생님! 얽이 방울토마토 거의 다 익었어요!”
 상희가 먼저 소리쳤다. 그 얼굴에는 오랜만에 순수한 기쁨이 담겨 있었다. 정원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열매를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작은 축제 같았다. 정원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일이면 다 같이 수확하겠네.”
  그때였다. 상희가 다시 뛰어왔다. “선생님! 물뿌리개 하나가 없어졌어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텃밭 옆 나무 벤치 아래에 늘 두 개 있던 물뿌리개 중 하나가 사라져 있었다.
  “누가 가져갔대?” “모르겠어요.” “그럼 누가 물 줬어요?” 웅성임이 커지는 순간, 누군가가 조용히 말했다.

“아까 수영이가 물 줬잖아요.”
  정원의 심장이 순간 내려앉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수영에게 쏠렸다. 수영은 아무 대답 없이 서 있었고, 그 무표정이 정원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수영아, 혹시… 물뿌리개 가져갔니?”
  정원은 말이 나오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말투를 닮아버린 것이다.
  수영의 표정이 단단히 굳었다. “왜요?”
  “그냥… 네가 물 줬다고 해서—”
  “그럼 제가 훔쳤다는 건가요?”
  작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아이들 사이에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얘 어제도 벌레 만졌잖아.”
  “오염됐대.”
  “그러니까 물도 가져간 거 아니야?”

 상희도 처음엔 그 웃음에 휩쓸릴 듯 보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얼굴이 붉어진 채 시선을 피해버렸다.

“선생님은… 수영이만 챙기잖아요.”
  정원의 가슴이 쩌릿하게 흔들렸다. 상희는 늘 중심에 서 있던 아이였다. 최고 학력을 가진 부모, 넉넉한 집안, 어른들에게 예쁨 받는 외동딸. 그래서인지 무리의 분위기를 쥐고 흔드는 데 익숙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몇몇 여자아이들을 슬쩍 끌어들여 분위기를 돌리는 것도 능숙했다. 그 작은 영향력이 때로는 바람처럼, 때로는 파도처럼 반 전체를 흔들었다.

정원이는 아무 제재를 하지 않았다. 불가항력처럼 몰려드는 말들 속에서 정원의 몸속 어딘가가 ‘쾅’ 하고 울렸다.
 정원은 아이들 전체를 향해 소리쳤다.
 “그만!”
 소리가 운동장까지 번져 나갔다. 아이들은 움찔하며 말을 멈췄다.
 “누구도 잘못했다고 단정 짓지 마.”
  정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왜인지 아이들의 목소리가 과거 교무실에서 들리던 말과 정확히 겹쳐졌다.


유 부장님, 선 넘지 마시죠.

부장 교체는 통보된 적이 없었어요.

전날 오후에 공개수업 취소라니요?


설명도 없이 사라진 옆자리 책상, 아무도 묻지 않던 눈빛, 혼자 남겨졌던 교과전담실의 공기.

누구의 탓이었을까. 내가 잘못했다고 한숨짓는 걸까. 왜 나는 그렇게 쉽게 나를 의심한 걸 당연한 듯 받아들였을까.


  “그만! 그래. 그만하자.”
  목소리가 터지자 아이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정원의 숨은 거칠었고,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정원은 모종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얽희 물은 내가 줄게. 다 교실로 들어가자.”

상희는 정원과 잠시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텃밭에는 정원과 수영만 남았다. 바람이 조금 더 세게 불었다.

" 선생님도 똑같아요."

수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돌을 발로 툭 차며 말했다.

" 처음엔 다 아니라고 해여. 근데 나중엔 다 그래요."

정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 애들이요."
수영이 말을 끊다 이었다.
" 저 가까이 오지 말라 그러고, 더럽다 그러고."
" 선생님도… 속으로는 그럴 거잖아요."

수영은 말을 던지듯 하고는 등을 돌렸다.

정원은 첫날 수영이가 자신의 손을 거부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손을 뻗치려다 멈췄다. 대신 한 발짝 물러서 조용히 말했다.

" 수영아, 잠깐만."

수영이 휙 돌아섰다.

" 왜요?"

바람에 얽이가 크게 흔들렸다.

정원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 난 네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

"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수영이 날카롭게 말하며 돌을 세게 찼다.

" 짜증 나."
" 다들 이러는 나 보고 도망가잖아요."

수영은 다시 몸을 돌렸다.

" 그러니까 그냥 놔두세요."
" 어차피 다 떠나요."

정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삽자루가 미세하게 울렸다.

" 그런 줄 알았어."

정원은 낮게 말했지만,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걸 느꼈다.

" 아무 말 안 했는데도,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거."

수영의 발이 멈췄다.

" 거 봐요."

수영이 툭 내뱉었다.

" 그러니까 선생님도 똑같다니까."

정원은 고개를 저었다.

" 그래도 말이야."
" 그래서 너보다 먼저는 돌아서지 않으려고."

바람이 세차게 지나가며 얽이의 잎을 흔들었다. 잎 하나가 툭, 땅에 떨어졌다.

정원은 그 잎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말했다.


그래. 나도 밀어냈지.
다가오기 전에, 먼저.
그래서 이번엔…
밀쳐지더라도, 잠깐은 서 있으려고.


" 수영아."

정원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 네가 화내고, 밀쳐도."

잠시 숨을 고르고,

" 난 바로 떠나가지는 않을 거야."

수영은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발끝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흙 위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하늘 한 편이 어두워졌다. 곧 비가 올 것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큰 바람에 얽희가 크게 흔들렸다.

정원은 삽을 다시 손에 쥐고, 말없이 텃밭을 바라보았다. 여름은 늘 이렇게, 먼저 흔들고 나서야 지나간다.

화, 금 연재
이전 09화9장 벌레의 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