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가을: 수확의 계절
11장. 폭우는 지나간다
폭우가 멈춘 뒤의 텃밭은 조용했다. 흙은 물을 잔뜩 먹어 부풀어 있었고, 방울토마토 덩굴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젖은 잎사귀들은 흙바닥에 납작하게 들러붙었고, 이파리는 빗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찢어져 있었다. 방울토마토는 붉은 속살이 터져 흙탕물과 엉켜 있었다. 기울어진 지지대는 비바람이 지나간 방향을 그대로 가리키고 있었다.
정원은 쓰러진 덩굴 옆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손끝으로 진흙을 털어내며 줄기를 들어 올리자, 흙에 눌려 있던 잎 사이에서 아주 작은 새순 하나가 또렷하게 솟아 있었다. 흙물이 묻어 있었지만 잎 끝은 선명한 초록빛을 잃지 않았다. 정원은 그 새순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비바람이 얼마나 세게 불었는지 텃밭 전체가 한눈에 드러내고 있었다. 지친 줄기, 찢어진 잎, 흙 속에 묻힌 열매. 그런데도 새순은 그 틈에서 밀고 나왔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젖은 흙을 눌렀다. 서늘한 물기가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정원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에 잠긴 엉킨 줄기, 비에 씻겨 내려간 흙, 여기저기 찢겨진 잎 조각들. 이 모든 것이 텃밭이 통과한 여름의 흔적이었다.
쓰러진 줄기들이 뒤엉켜 밤새 긴 한 숨을 내뱉었나 보다. 이렇게 쓰러질 수도 있지. 갑자기 쏟아진 폭우라면, 누구라도 이렇게 되겠지.
그녀는 텃밭 모퉁이에 거꾸로 엎어 둔 빨간 고무대야에서 가위를 찾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꺾인 잎을 하나 들어 올리자 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정원은 잘라야 할 가지와 남겨야 할 가지를 조심스럽게 구분했다. 축축한 잎들이 가위날에 스치며 비닐봉투 안으로 떨어졌다. 부러진 줄기를 자를 때마다 손목에 작은 진동이 전해졌다.
한참을 손을 움직이다 고개를 들었을 때 텃밭은 처음보다 훨씬 정돈되어 있었다. 쓰러진 줄기는 여전히 땅에 닿아 있었지만 살려야 하는 가지들은 전보다 또렷했다. 새순도 숨 쉴 자리를 찾은 듯 훨씬 선명하게 빛났다. 정원은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바람 속에 섞인 흙냄새가 천천히 스며왔다. 무릎 위로 굴러온 흙이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텃밭은 쓰러진 게 아니었다. 쓰러진 채로 여름의 폭염과 장마를 지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흔들리고 무너지면서도 계속 자라고 있는 것이었다. 정원은 눈을 가만히 감았다. 땅에서 올라오는 묵직한 냄새가 가슴까지 번졌다. 쓰러진 덩굴을 바로 세우려 했던 손이 어느새 멈춰 있었다. 여름 한가운데였다. 폭우는 이미 지나가 있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수영이었다. 비에 젖은 운동화를 질질 끌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은 텃밭의 상태와 비슷해 보였다. 한쪽 신발엔 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눌려 있었다. 아침부터 학교에 들어오지 못한 아이 같았다. 정원은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수영은 쓰러진 줄기를 한 번, 정원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이거… 다 쓰러졌어요?”
“응. 비가 많이 왔거든.”
“어... 얽희 살아 있네요.”
수영이 새순을 가리켰다. 정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없이 새순을 서로 바라보았다.
수영이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주머니에서 꺼냈다. 손바닥엔 작게 구겨진 물뿌리개 꼭지가 있었다.
“어제 이거… 잃어버린 거 아니에요?”
“제가… 떨어뜨렸어요. 찾았어요. 미안해요.”
정원은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영이 들고 있는 플라스틱 조각을 살폈다. 부서진 자국이 비에 씻겨 희미해져 있었다.
“괜찮아.”
“잃어버리는 날도 있고, 부서지는 날도 있는 거니까.”
그 말은 꾸짖음도 용서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 그대로였다.
“이건 다시 세워요?”
수영이 지지대에 손을 댔다. 그의 손가락은 뭉툭하고 손재주가 없어 보였지만 지금은 듬직한 일꾼의 손이었다.
“그래. 같이 해볼까?”
두 사람은 쓰러진 지지대를 천천히 일으켰다. 젖은 흙이 발목에 묻고 손바닥에 흙물이 배어들었다. 지지대를 다시 꽂는 동안 수영은 말없이 줄기를 손으로 잡아주었다. 그 손끝은 조심스러웠다. 교실에서 책상 위, 서랍 안 수북한 잡동사니를 끼워 놓고 물뿌리개도 어디 두었는지 잊어버리는 산만하고 충동적인 아이라고 믿져지지 않았다.
수영은 지지대를 단단히 고정하자 줄기가 흔들리다 멈췄다. 새순도 제 자리를 잡은 듯 미세하게 방향을 틀었다.
“선생님.”
“이거… 살겠죠?”
정원은 잠시 그 새순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응. 살 거야. 쓰러져도 살아 있더라.”
그 말은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말 같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던지는 말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한 번 스쳐 지나가며 흙냄새를 밀어 올렸다. 수영은 손바닥에 묻은 흙을 옷에 문질러 털었다. 그 행동이 어색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멀리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희가 가장 먼저 달려오고 있었다.
“선생님! 텃밭 봐도 돼요?”
정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심해서 와.”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살았네!”
“우와, 새잎 올라왔다!”
“근데 왜 이렇게 많이 쓰러졌어?”
그때 상희가 뒤쪽에서 조용히 말했다.
“…근데 다시 세우면 살 수 있는 거죠?”
정원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상희의 눈빛에는 이전과 다른 기척이 있었다. 경쟁심 대신, 무언가를 살피려는 마음.
“응. 다시 세우면 살 수 있어.”
수영이 지지대를 다시 세우고, 승욱이 다른 지지대를 찾아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둘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손이 닿아 있었다. 상희는 그 모습을 멀찍이 서 바라보다가 속으로 아주 작은 탄성을 삼켰다.
‘저렇게… 티도 안 내고, 그냥 할 일을 하는구나. 멋있네.’
정원은 아이들 셋을 한눈에 담았다. 쓰러진 텃밭은 여전히 엉켜 있었지만, 그 위에서 수영과 상희는 조금씩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쓰러지지 않은 게 아니라, 쓰러진 자리에서 자라는 법을 익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