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일에는 용기가 필요해.
턱걸이로 들어간 지방대 4년제.
낯선 유치원에 엄마 없이 남겨진 세 살짜리 아이처럼 겁이 났다.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해야만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던 엄마 친구 옥분이 아줌마 말이 생각났다. 대기번호 14번이었던 내가, 운이 좋게. 아니, 운이 나빠서 들어갈 수 있었던 그 전자상거래 학과. 그것도 야간이었다.
마을 장터에서 5일장이 열린 날, 엄마가 노란색 꽃무늬 이불을 사며 말했다. "이건 기숙사 가서 덮으라고 사는 거야." 2층 침대 두 개가 비스듬히 놓인 기숙사에서 나는 같은 학과 친구들과 방을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숙사에 있던 우리 네 명 모두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화장을 어떻게 해야 예쁘고 귀걸이는 어떤 게 더 예쁜지, 공부보다 그게 더 중요했으니까.
나와 같은 기숙사를 쓰던 친구들은 일 년이 지나지 않아 모두 자퇴를 했다. 아니, 한 명은 전과를 했던가? 20년도 더 된 기억이라, 기억이 안개 낀 장충단 공원 같다. 그해 나는 제일 많은 술을 마셨다. 잔비어스라는 술집에서 선배가 사주는 맥주를 먹고, 학교 잔디 앞에서 잠이 들었다. 술도 못 마시는 게.
5분, 10분씩 늦게 들어가던 수업시간을 하루 그리고 이틀 째기 시작했다. 누구 말대로 나는 비싼 PC방에 다니는 애였다. 수업시간에 제일 뒤에 앉아 인터넷 쇼핑을 했다. 폴로 최저가 사이트를 비교하며 클릭하는 게 비싼 수업비를 내고 수업시간에 하는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노란색 학사경고 종이가 날아들었다. 대학교를 1년 반 다니던 해였나, 2년이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퇴서를 쓰는 날, 남색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쓴 것만 기억이 난다. 부끄러웠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않았으면 했다. 범죄자처럼 나는 그 학교에서 나를 지웠다.
인생이 꼬인 건 거기였다. 대학교를 간 것. 남의 눈, 남의 입방아에 오르기 싫어서 꾸역꾸역 불어 터진 국수를 먹듯 맞지도 않는 대학교와 학과를 선택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캐나다를 갈걸.
배워두면 나중에 쓸모가 있다고 했던 전자상거래 학과였다. 전자에는 관심 없고 상거래만 좋아하던 나에게는 고역이었다. 실습 위주의 수업, 컴퓨터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건 나와는 맞지 않았다. 학교는 천안에서 조금 더 먼 곳에 있었다. 친구네 집에 하루, 이틀 신세를 지다 한 학기를 거기서 눌러 지냈다. 그녀는 다정했고 친절했다. 친구가 휴학계를 내고 학교에 오지 않은 후부터 나는 학교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수업시간에는 5분, 10분씩 늦다가 한 시간, 두 시간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에 나가는 대신 잔디밭에 앉아 새우깡을 먹으며 시간을 때웠다.
4년제를 자퇴하고 수능을 보지 않아도 되는 지방 2년 제로 입학했다. 편입이라고 해야 하나? 편입은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걸 말하는 것 같은데, 아무튼 4년제를 자퇴하고 2년제 지방대에 들어갔다. 그게 유아교육과였다. 엄마 친구 옥분이 아줌마 말대로 졸업장이 필요했다. 사람구실을 해야 했으니까. 수능 없이 들어갈 수 있는 학교와 학과, 그게 지방대 2년제였고, 그게 유아교육과였다.
캐나다에 와서 한국 사람들 빼고 내가 나온 대학을 물어본 사람들은 없었다. 서울대학교니 고려대학교를 나왔다고 뻥을 쳐도 몰랐을 텐데. 하긴 여기 사람들은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살다 보면 전부일 것 같은 것들이 사실은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세상은 넓고, 내가 하는 고민들은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아니 장소를 바꾸고 보면.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다는 걸. 나는 캐나다에 와서 알았다.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아마 여전히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맞지 않는 길을 꾸역꾸역 걸어어 갔을 거다.
캐나다에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이 되어도 괜찮다는 사실을 배웠다. 남이 만든 기준이 아닌 나만의 기준으로 나를 정의하는 법을. 실패도 성공도 결국 내가 선택한 길 위에서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걸.
돌이켜보면, 지방대 4년제 자퇴는 실패가 아니라 나를 다시 시작하게 해 준 출발선이었다. 지방대, 그리고 캐나다. 그 여정은 내게 하나의 진실을 가르쳐 주었다.
세상은 넓고, 인생은 단지 우리가 어디서 시작했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향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