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된 이별
‘유리야, 나 요즘에 왜 이리 잠이 안 올까? ‘
2020년 7월 여름날. 어머님과 전화 통화를 하던 중 어머님이 최근 들어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했다. 생전 없던 불면증이 생겼다고 하셨다. 날씨도 덥기도 하고 기운이 없어서 그럴 거라며 안심시켜 드렸다. 그리고 그 주 주말에 보양식을 사드리려고 어머님과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오랜만에 뵌 어머님은 조금은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자서 어지럽고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하셨다. 평소에 건강하시고 밝은 어머님을 뵙다가 약해진 모습을 처음 보게 되었다. 연세가 있으시니 먹는 것 잘 챙겨드리고 보약이라도 지어드리자고 남편과 이야길 나누었다.
식사를 함께한 다음 주. 아버님께서 연락이 왔다. 어머님의 어지럼증이 조금 더 심해진 것 같아 집 근처 이비인후과에 이석증인지 검사를 받으러 왔다고 했다. 우리를 만난 후로 계속 컨디션이 좋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렇게 또 일주일이 지났다 진료 결과는 다행히 이석증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큰 병원에서 뇌 쪽을 정밀 검사해보라고 했다. 뇌와 관련되었다고 하니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급하게 대학병원의 외래진료를 예약했다. 대학병원은 원한다고 내일 당장은 진료를 받을 수 없어 교수님과의 진료를 받기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또 일주일이 지났다.
병원 예약 당일날 어머님은 앉아 있으시면 어지럽고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아서 침대에 누워 우리를 맞이했다. 혼자서 걷으실 때 벽을 짚고 걸으셨고 약간 옆으로 기울어지거나 넘어지실 것 같아서 부축을 받아야 걸으실 수 있었다. 난 뭔가 이상한 느낌이 이때부터 들었던 거 같다.
대학병원에 가자마자 머리 CT, MRI 사진을 찍고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불안하게도 의료진은 계속 추가로 검사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당장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족들은 영문도 모른 채 뜬눈을 새운 채로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우린 담당 의사에게 믿기지 않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의사는 한동안 머뭇거리며 입을 쉽게 떼지 못했다. 숨을 한번 가다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님의 진단명은 크로이츠펠트 야곱병입니다.”
야곱병.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병명에 진료실엔 순간 침묵이 흘렀다. 의사는 이어서 말했다.
"결론부터 말을 하자면 이 병은 전 세계적으로 약 100만 명당 1명꼴로 발생하는 병이며 아주 드문 희귀 질환입니다. 뇌 조직이 점점 파괴되어 결국은 100퍼센트 사망을 하게 됩니다.
현재 기술로는 치료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병원에서는 해드릴 게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
두 귀를 의심했다. 사망? 어머님이 사망이라고요? 남편과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렸다. 너무 충격적인 말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의사 입에서 나온 모든 말들이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 같았다
알츠하이머보다 진행 속도가 훨씬 빠른 퇴행성 질환인 야곱병은 이라 앞으로 빠른 시간 안에 운동기능, 언어기능이 모두 상실된다고 했다. 나중엔 생존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기능마저 잃게 되는 무서운 병이라고 한다.
더 믿을 수 없는 사실은 어머님의 병은 빠르면 1개월, 드물게 1년 정도 버틴다고 했다.
지금 눈 마주치며 이렇게 멀쩡히 이야기하고 대화를 나누는 어머님이 곧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가족들은 모두 무너져 내렸다.
분위기가 이상하단 걸 눈치를 채셨을까. 입원 며칠 후 어머님께서 나지막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유리야, 나 혹시 죽는 병이야? 사실대로 말해줘. 그런 거지?”
아버님도 두 아들도 어머님의 병명을 전해주지 않으니 큰며느리인 나를 불러 물어보셨다.
사실대로 말씀을 드릴 수 없었다. 뇌 쪽에 문제가 생긴 건 맞지만 치료하면 꼭 나을 수 있다고 어머님 손을 꼭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꼭 나으실 수 있어요. 어머님.
병원에서는 더이상 해줄 수 있느게 없다며 퇴원을 시켰고 어머님을 우리집에서 모시기로 했다.
하루하루 어머님의 진행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가족들 모두 어머님 곁에서 생활을 하기고 결정을 했다. 아버님은 시댁애서 키우던 뽀삐를 데리고 집으로 오셨다.
어머님이 입원해 있는 기간에 아버님 혼자 왔다갔다하며 뽀삐를 챙기긴 했지만 아무래도 어머님이 자리를 비운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뽀삐는 예전보다 말라있었고 기운도 없어보였다.
오랜만에 어머님을 만난 뽀삐는 반가운지 어머님 주위에 맴돌고 곁에 꼭 붙어 있었다.
도련님도 동서와 조카를 데리고 와서 우리 집에서 같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퇴근 후 다같이 와서 어머님과 시간을 보내고 다음날 출근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3가족 모두가 함께 우리집에서 지내게 된 것이다. 모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공간인 거실에 누울 자리를 마련하고 어머님은 거기에 누워서 생활을 했다.남편은 어머님이 오신 이후부터 회사도 나가지 않고 하루 종일 어머님 곁에서 어머님을 간호하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나조차 어머님의 결과를 믿을 수 없는데 남편이 받아들이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님과 남편은 유독 사이가 각별했다. 집안의 장손이며 장남인 남편은 3주 전 어머님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을 때 바로 병원에 빨리 왔었다면 달라졌을까? 수없이 되뇌며 후회하고 괴로워했다. 의사는 이미 그때도 병이 진행이 된 상태였기에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집으로 어머님을 모시고 난 후, 어머님 앞에선 울음을 보이지 않기로 가족끼리 약속을 했다. 그러나 우린 매일 밤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어머님의 증세는 의사 선생님의 말대로 하루가 멀다 하게 급속도로 나빠졌다. 집으로 온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혼자서 걷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고 방향 감각을 상실하셨다. 그리고 혼자서 밥을 떠먹지도 못해서 숟가락으로 떠서 먹여야 했다. 손과 발의 움직이는 기능이 서서히 변해갔다. 또 며칠 후에는 언어 기능을 상실했다. 세상에. 말을 못 하게 되다니. 우리가 말을 하면 알아듣긴 하시고 고개만 끄덕일 수 있는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 이 모든 일은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불과 1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벌어졌다. 진행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서 무서웠다.
매일 밤 가족들은 고통 속에서 하루를 지새웠다. 아버님은 더 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에, 두 아들들도 마찬가지로 더 잘해드리지 못함과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현실에 아프고 괴로워했다.
어머님이 듣지 못하게 되기 전에 우린 매 순간 어머님 귀에 대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믿을 수 없게도 얼마 되지 않아서 어머님은 거의 모든 기능들을 잃으셨다. 초점도 맞지 않는 눈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정말 힘들었다.
뽀삐는 어머님이 거실에 누워계시는 한 달 동안 매 순간 어머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평상시와 다른 것을 알아챘을까. 어머님 얼굴 곁에 서서 왕왕하고 짖어도 보지만 어머님이 대꾸를 하지 않으니 하루 종일 어머님 옆에만 있었다. 어머님을 지켜주는 것 같았고 이별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 달 반 정도 우리 집에서 생활을 하시다 이젠 더 이상 간호가 어려워진 상황이 되어 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면회가 쉽지 않았다. 증상의 속도가 빨라서 한 달을 버티기 힘들다고 병원에서 말은 했지만 어머님은 호흡기를 꽂고 의식이 없으신 채로 1년을 버티시다가 가족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