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체제와 주체성 사이에서

by 도토리







<구덩이>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당신들은 공화국 전체를 집단 농장으로 만들 거고 그러면 공화국 전체가 하나의 사유 재산이 되어 버릴 거요. 오늘은 내가 사라지지만 내일은 당신이 끝장날 거야. 그리고 결국은 당신들 우두머리 한 사람만 살아서 사회주의를 맞이하게 될 거요!"



이 책을 읽기 전에 당시 러시아의 사회적 배경을 짚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1918년 이후 러시아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촉발된 백군과 붉은 군대의 내전을 거치며 사회 전반이 황폐화되었다. 스탈린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28년부터 토지 집단화와 공업화를 주요 골자로 한 1차 5개년 계획을 추진한다. 그러나 토지 집단화 과정에서 농민들의 저항은 ‘부농’으로 규정되어 폭력적으로 억압되었고, 그 결과 농업 생산력은 급격히 붕괴되어 1932년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이어졌다. 혁명을 지지했던 플라토노프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혁명의 수행 방식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되어, 집단화 초기의 혼란과 균열을 이 책에 담아낸다.

이 작품을 접하면 어느 잔혹 동화 속 기이한 공동체에 들어선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등장인물들은 마치 입력된 대사를 따라 연극하듯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표현 방식은 읽을수록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면서도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호기심을 자아낸다.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보면, 검열의 시대였기에 선전 문구나 공식적으로 정부가 사용한 언어가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작품 속 언어는 당시 소비에트 사회의 획일화된 언어 현실을 은유적으로 반영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작품은 사색에 잠겼다는 이유로 해고된 보셰프가 프롤레타리아의 집 건설을 위한 구덩이를 파는 노동 현장에 투입되며 시작된다. 보셰프는 끊임없이 노동의 목적과 자신의 존재 이유를 사유하지만, 이와 대조되게 주변의 노동자들은 미래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명분 아래 의미 없는 노동을 반복할 뿐이다.

보세프는 그런 그들에게서라도 노동의 이유를 알고자 만족과 행복의 흔적을 찾으려 하지만, 깊어지는 구덩이와 대비되는 깡마른 신체를 가진 사람들만 보일 뿐이었다. 즉, 국가는 행복이 넘치는 미래 유토피아를 약속하지만, 이는 실체 없는 약속일 뿐이었다. 현실은 기근과 가난에 허덕였고, 사람들은 당의 선전 문구를 무비판적으로 흡수하여 그대로 말하며, 강도 높은 노동을 제공해야 했다. 이것이 스탈린 시대 노동자들의 현실이었다. 플라토노프는 이러한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자 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보셰프가 사색에 잠겼다는 이유로 파면당하는 작품의 첫 장면은 이러한 현실을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국가는 개인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무시하고, 당의 정책을 따르기를 주입한다.

"모두들 한꺼번에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면 행동은 누가 하겠소? "


부르주아 지식인 출신 감독관 프로솁스키, 그리고 사회주의 이상적 노동자의 전형인 치클린, 혁명에 순응하지만 개인의 실존적인 문제를 사고하는 보셰프, 이념에 세뇌당한 미래세대를 상징하는 혁명의 목적을 상징하는 나스탸, 부패관료의 전형인 파시킨, 각각의 인물이 소비에트 연방의 여러 인간 군상을 대표한다. 이들 모두가 체제의 모순을 감지하여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지만 거기까지 일 뿐 사유하지 않는다. 이는 지적 결핍이 아닌 사유 자체가 반혁명이었던 체제 속에서 개인의 생각은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라진 부농계급을 보며 보세프가 너무나 기쁘게 "당신들도 나처럼 되었군요 나 역시 아무것도 아니오."라고 말하는 장면은 보편화된 비극이 평등과 행복으로 오인되는 아이러니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플라토노프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체제는 인간성을 가진 생각하는 개인을 반혁명적인 나약한 자로 분류하여 혐오하고, 집단 속의 개인으로 순응하길 바라며, 개인의 생각과 감정은 배제하기를 강요한다.

혁명의 본질은 사라진 채, 누구를 위한 혁명인지, 혁명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고 있는 플라토노프를 통해, 혁명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닌 혁명이 개인의 삶을 위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개인이 그 주체가 되지 못하고 전도된 상황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다. 나스탸의 죽음 이후에도 깊어지는 구덩이는 목적을 상실한 혁명이 어떻게 개인의 존재를 배제한 채 공허한 노동만을 남겨두는지를 드러낸다. 목적성이 사라진 구덩이는 지금도 깊어지고 있다.


— 함께 들을 곡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혁명' 2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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