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입시판에서 누구나 성공하는 법

나로 충만한 인생 - 대학 입시(1)

by 승현

대학입시에서 성공하다.


나는 대학 입시에 성공했다. 의대일까? 서울대일까? 아니면 고대? 연대?


한국외대다.


정적. 귀뚜라미 소리가 울린다.


감히 외대 따위가 성공을 운운할 자격이 있는가?


있다. 성공의 기준은 ’내‘가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공은 무엇보다도 주관적이다. 내가 내 인생에 만족하기만 하면 남들이 뭐라하든 무슨 상관인가. 애초에 질문 자체도 잘못되었다. 자격은 허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격은 인간이 만든다. 자격을 만들 자격은 무엇인가? 그렇게 만들어진 자격이 탁월함을 담보하는가? 현실의 많은 자격은 오히려 좋은 인재를 놓치게 만들기도 한다.


슬프게도 외대는 대표적으로 남들이 쉽게 뭐라하는 대학 중 하나이다. “건대 경영 vs 외대 어문” 이는 외대의 입시결과가 예전에 비해 낮아지고 건국대의 평균 합격 성적이 높아지면서 발생한 논쟁이다. 많은 외대생들이 주눅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외대 익명 커뮤니티에서는 건대의 상승세를 인정하고 외대를 짓밟는 발언을 하면 그나마 똑똑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아픈 현실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용기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정말 안타깝다. 피식민지 주민이 식민지 논리를 답습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반면 나는 이 논쟁에서 자유롭다. 관련 게시글을 볼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내 모습에 오히려 내가 놀라곤 한다. 외대생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여전히 외대와 내 어문 전공이 좋다. 자부심이 있다. 그러면서도 건대 입결과 외대 입결이 겹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외대의 하락세를 인정하는 것과 외대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공존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충분히 의심할 수 있다. 애써 높지 않은 학력을 합리화하려는 것 아닌가? 자기 위로에 불과한 것 아닌가?


앞으로 나를 탐색하고 진로를 정하는 과정을 설명할 것이다. 이는 곧 위의 의심에 대한 답변이기 때문이다. 아주 길 것이다. 도중에 길을 잃을 수 있다. 그래서 답을 먼저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나다운 선택‘이 유치한 싸움에서 나를 구했다.” 성적만 보고 외대를 선택했다면 나는 외대를 금방 싫어했을 것이다. 건대 외대 논란을 볼 때마다 편입을 고민했을 것이다. 이는 성적 때문에 벌어진 논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길‘을 따라 걸었더니 도달한 곳이 외대였다. 이런 사람에게 성적에 매몰된 싸움은 큰 영향을 주기 어렵다.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결과이다.


전공 선택(1) 일본을 고민하다.


나는 고등학생 때 생각했다. 대학에서 최대한 많은 걸 배우고 싶다고. 그래서 백중전공을 하고 싶었다. 복수전공은 성에 차지 않았다. 찾아보니 그나마 서강대가 삼중전공을 허용했다. 사중전공부터는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 생각을 품고 살다보니 어느날 ‘지역학’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였으면 그냥 지나쳤을 단어였을지 모른다. 지역학이란 지역 하나만 고르면 언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예술 등 전 분야를 배울 수 있는 학문이었다. ”아, 내 거다.” 지역학을 잘 하는 대학이 어디인지 찾아봤다. 단연 한국외대였다.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여전히 지역학 검색어에 가장 강하게 반응하는 학교는 외대이다. 이제는 지역만 고르면 됐다.


처음엔 일본을 선택할 생각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J-POP을 즐겨들었기 때문이다. 중학교에서 이미 일본어를 꽤 배웠기 때문에 친숙하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의 나는 수업만 끝나면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리그오브레전드를 켰다. 가장 먼저 교실을 나가서 가장 빠른 버스를 타는 일은 그 시절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방과후 교실을 의무화했다. 내 세상은 무너졌다. 친구가 일본어 수업을 같이 듣자고 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미 일본 음악에 관심이 많았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재밌어 보였다. 그래서 처음으로 일본어를 배우게 되었다. 일본어 선생님의 칭찬도 많이 들었다. 칭찬을 동력 삼아 질주했다. 그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게임 생각은 빨리 사라졌다. 문법도 딱히 어렵지 않았다. 문장 형성 방식이 한국어와 비슷했다. 어순도 같았다. 한자 문화권이라 한국어와 비슷한 단어도 많았다. 그렇게 신나는 한 학기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 학기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방과후 수업이 의무가 아니었다. 학생들의 반발이 심했나보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당연하게도 신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고민 없이 일본어 수업을 다시 신청했다. 게임에 푹 빠져있던 내가 말이다. 그렇게 2년을 들었다. 돌이켜 보면 이게 적성이구나 싶다.


적성이란 무엇인가?


나는 적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어떤 분야를 꾸준히 할 수 있는 능력“ 어떤 일이든 나아가다 보면 포기하고 싶기 마련이다. 성장하고 싶으면 반드시 실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쓴 맛을 견디면서까지 계속할 수 있는 분야는 분명 적성이다. 물론 우리 아빠처럼 생계를 위해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꾸준히 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많다. 우리 아빠 정말 존경스럽다. 이런 건 적성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부른다. 아무튼 꾸준히 할 수 있는 것과 꾸준히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르다는 점을 유의하면 좋다.


적성은 사람마다 다르게 타고난다. 예컨대 나는 수학 문제를 꾸준히 풀지 못했다. 물 없이 고구마 먹기보다 훨씬 어려웠다. 이 순간 누군가는 핑계 대지 말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그럼 해낸 사람들은 특별해서 해낸 거냐고. 사실 노력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할 말은 없다. 노력은 너무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수학 문제를 풀면서 느낀 감정은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만 안다. 그래도 흔히 10대 명문대라고 불리는 대학에 들어간 학생이라는 점을 고려해줬으면 좋겠다. 노력에 대해 조금은 판단할 수 있을 만큼의 소양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수학에는 적성이 있을 수 있다. 수학 문제 풀이와 수학이라는 학문은 다르기 때문이다. 학문의 관점애서 대학 입시 교육은 조악하다.


해낸 사람들은 특별해서 해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공부에 적성을 가진 사람은 다수이기보다 소수일 수밖에 없다. 다수였으면 적성이라는 표현이 붙을 수 없다. 무엇이든 어려운 일을 지속하는 능력은 절대 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수에게 적성인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다수에게 쉬운 일일 뿐이다. 또한 공부 중에서도 특정 과목에만 적성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장 나부터도 수학은 힘들었지만 사회탐구 과목은 아무리 틀려도 재밌었던 것처럼 말이다. 모든 과목에 적성이 있는 사람이 드문 것은 당연하다.


대학 입시 수준에서는 적성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반론할 수 있다. 이 문제도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리고 충분히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존중한다. 하지만 나의 주장도 존중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교육 과정은 12년 동안 꾸준히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2년이라는 시간이 공부에는 적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1년만 열심히 해도 충분한 게 대학입시라고도 주장할 수도 있다. 이 대답은 ‘꾸준히’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떤 일이든 1년을 지속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고. 그러니 1년이면 적성이라고. 새해가 찾아오면 결심하는 목표들을 떠올려보자. 헬스, 필라테스, 일기, 독서 등 말이다. 사실 일주일도 어려운 것이다.


적성의 예시를 수학으로 드는 바람에 말이 길어졌다. 다른 예시도 찾을 수 있다. 당장 글쓰기도 나의 적성이다. 글쓰기 능력을 기르기 위해 첨삭을 받고 다시 쓰는 과정을 반복했다. 당연히 힘들었다. 하지만 글을 꾸준히 쓸 수 있었다. 글쓰기는 몰입이 너무 잘 되고 재밌다. 그리고 나는 정치 비평을 좋아한다. 보는 것도 좋아하고 직접 하는 것도 좋아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아니 중학교 때부터 꾸준히 봤다. 누군가는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정치를 싫어한다. 하필 나이기 때문에 이들이 눈에 밟힌 것이다. 내가 타고는 것. 하필 나라서 보이는 것들. 이런 것이 적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