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충만한 인생 - 대학 입시(2)
“일본 곧 가라앉는다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일본 지역학을 대학 전공으로 고민하는 중이라고 말하면 자주 돌아오던 답변이었다. ‘가라앉는다’라는 표현은 경제적 침체를 은유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물리적으로 가라앉는다는 말이었다. 그때는 기후위기가 가장 뜨거운 주제였다. 남태평양의 섬나라들이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물에 잠기고 있다는 뉴스가 줄을 이었다. 이러한 보도 기조 속에서 일본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일본을 이 흐름에 끼워 넣으면 폭발적인 기사 조회수를 분명 보장받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일감정이든 가라앉았으면 하는 염원이든 일본에 대한 우리나라의 국민정서가 반영된 결과였다. 당시 나의 귀는 코끼리 귀만큼 컸다. 아주 펄럭였던 것이다. 그런 정보를 필터링할 수 없었다. 아직 논리적 사고가 어려웠다. 비판적 사고도 어려웠다. 그래서 일본을 쉽게 접어버렸다. 그때의 나에게 일본은 그저 비전이 없는 나라였다. 곧 가라앉을 섬나라에 불과했다. 만약 일본학을 전공한다면, 일본인의 한국 이주에 미래를 걸 생각이었다. 실제로 일본인이 불안감에 우리나라 땅을 사고 있다는 소식도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본에 대한 열정은 점점 사라져 갔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웃음만 나온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했던 과거의 나도 나다. 그 선택을 존중한다. 존중해야 한다. 그땐 적어도 진지했다. 그래서 더 귀엽지만 말이다. 아무튼 매 선택에 최선을 다했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후회가 없다.
물론 말로는 쉽게 접었다고 표현했지만 자그마치 1년 동안 일본에 온 힘을 다했다. ‘국화와 칼’과 같은 일본 문화 관련 도서들로 과제를 했다. 외대 융합일본지역학의 정치학 전공 교수님 책도 읽어 과제에 녹였다. 이처럼 생활기록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일본 지역학으로 모았다. 요즘 말로는 ‘영끌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언젠가 외대 융합일본지역학 과잠을 일본어 선생님께 보여드렸던 적이 있었다. 이거 입고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만큼 간절했다. 비록 3학년에는 일본에서 러시아로 돌아서지만 졸업하는 날까지 일본어 세특란은 가득했다. 일본어 선생님께 감사했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러시아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나를 외대 노어과로 이끌었던 것이다. 고2에서 고3으로 넘어가던 때 한창 러시아 클래식 음악에 빠져있었다. 하필 클래식이라니. 의아해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원래 피아노를 치는 것도, 듣는 것도 좋아했기에 이상할 건 없었다. 조금 자랑하자면 아마 우리 학년에서 나보다 피아노를 잘 치는 동기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인문계 고등학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독특한 취향이었지만 상당히 좋아했다. 면접과 논술을 보기 위해 외대에 갔을 때도 이 음악을 듣고 있었다. ‘라흐신’이 외대 노어과에 나를 붙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정해진 순간, 의지할 곳은 비과학적 무언가밖에 없었다. 사실 눈으로 덮인 새벽의 외대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너무 잘 어울렸다. 특히 피아노 협주곡 2번의 2악장 말이다. 그래서인지 더욱 붙을 것만 같았다. 아무튼 고3 시절의 나는 러시아 클래식 음악에 퐁당 빠져있었다.
나라가 가라앉는다는 이유로 일본을 포기하고 클래식이 좋아 러시아를 선택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낭만적이다. 낭만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단어이다. 그만큼 ‘이상적‘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냥 이상적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마냥 이상적이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러시아 선택에 있어서 클래식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긴 했지만 큰 틀은 현실적인 계산에 기초했다는 것 말이다. 우선 한국외대 일본학 전공은 외고나 국제고 학생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피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어도 수원외고나 울산외고처럼 꽤 어려운 존재들과 경쟁을 해야 했으나, 일본보다는 내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발까지 공중에 떠서는 안 된다. 지면에 발을 붙이고 이상을 바라봐야 한다. 이 현실성을 바탕으로 국가를 마음껏 선정하는 것이다. 당시의 나에게 러시아가 일본보다 더 매력적인 국가였다. 클래식뿐만 아니라 정치와 역사의 역동성, 북한 문제 해결의 잠재력, 세계적 주류가 아닌 비서방국에서 나오는 통찰에 대한 믿음도 크게 작용했다. 이에 반해 일본의 정치는 자민당 내부의 계파 갈등 위주인 데다가 정치 자금 문제로 인한 세습 정치 문화가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생각만 해도 지루했다. 답답했다. 호기심이 많은 다양한 분야들 중에서도 정치에 가장 큰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 나라의 정치적 측면이 재밌어야 했다. 그래서 일본은 탈락했다.
물론 일본을 공부하면 우리나라의 수도권 과밀집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지역들은 마치 미국의 주(state)처럼 한 나라를 고루 지탱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악기로 유명한 일본 음악계와 노벨상을 배출하는 일본 학계를 공부하면 근본적인 국가적 체질 개선에 도움이 될 만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돈이 되지 않기에 고악기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돈이 되지 않기에 기초과학에 힘을 쏟지 않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다. 많은 일본인은 이미 20세기에 세계적인 상을 여러 분야에서 따냈다. 다양한 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세계적 명성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이 세계적 수준으로 형성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일본학은 분명 매력적이다. 머리가 크고 나서 일본을 여러 번 갔다 온 후에야 일본의 가치를 깨달아 버렸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러시아는 나다운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도 당시의 나는 일본이 아닌 러시아를 선택했을 것이다.
문과 최상위권을 담당하는 선생님이 우리를 소집했다. 교육과정이 바뀌었으니 기존에 하던 커리큘럼에 사회 한 과목을 더 추가하라는 것이었다. 고3에 사회 한 과목을 더 하라니. 수능에서 사회를 세 과목 칠 것도 아니고, 시험 부담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모든 최상위권 학생들은 사회를 한 과목 더 선택했다. 나만 사회 대신 음악 과목을 선택했다. 살짝 불안했지만 내 선택에 확신이 있었다. 클래식 음악이 좋아 러시아어 전공을 선택한 나에게 음악 과목 추가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었다. 그렇게 음악 과목 세부특기사항은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사로 가득 찼다. 노어과 지원자들 중에서 이런 생기부를 가진 학생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나만 가진 이야기는 언제나 탁월한 강점이다. 사회 과목을 하나 더 듣지 않았기에 다른 경쟁자들보다 공부 시간을 더 벌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음악 과목의 실기 시험은 기존에 잘 치던 피아노 곡을 선택해서 전혀 부담이 없었다. 최고의 선택이었다. 이 선택은 나다웠다. 작은 변수도 치명적인 시기에 모두가 가는 길과 다른 선택을 하면서도 나에게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그리고 독창적인 생기부를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이외에도 지역학 동아리를 만들었고, 베트남어 수업도 수강했다. 제2외국어인 일본어 과목이 모두 1등급인 데다가 베트남어 수업을 추가적으로 들었다는 사실은 영어 만년 2등급을 보완하기에 충분했다. 러시아어 수업이 따로 없는 일반고 학생이었지만 러시아어에 대한 간접적인 학습 능력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현역 지원에서는 떨어졌지만, 수시 재수로 한국외대 노어과에 재도전하여 결국 합격했다. 합격의 비결은 단연 나다운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