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와 적성(2)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적성관’
“누군가와 다투고서 ’완벽하다‘라고 말하며 행복해 한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완벽이자 완전이며 행복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 꾸준히 할 수 있는 능력 또는 분야
이전 편에서는 ‘당장 끌리는 것’에 충실하면 결국 원하는 곳에 도달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천하려고 보니 막막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당장 끌리는 것을 해보고 재미없으면 바로 놓자. 반대로 꾸준히 할 수 있으면 꾸준히 하면 된다. 이해에는 사례 만한 것이 없다. 거창한 사례도 필요 없다. 나는 하체를 키우고 싶어 매일 스쿼트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사실 재미없었다. 무릎도 괜히 더 아픈 느낌이었다. 반면 팔굽혀펴기는 매일 적어도 100개씩 하자는 목표를 세웠고, 25년 5월 9일부터 현재 7월 15일까지 꾸준히 해왔다. 꾸준히 할 수 있는지 보기. 나한테 맞는 운동과 맞지 않는 종목을 쉽게 가려낸 방법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팔굽혀펴기보다 스쿼트가 더 쉬울 것이다. 더욱 꾸준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운동에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다. 책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러시아 문학에 열심히 도전했다. 그러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세 권 중 한 권을 겨우 읽었고, ‘죄와 벌’과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펴자마자 덮었다. 그나마 솔제니친의 ‘암병동’이 재밌었는데, 그마저도 두 권 중 한 권을 겨우 읽고 그만두었다. 반면 ‘데미안’은 후반의 어려운 부분조차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정의란 무엇인가’ 또한 짧은 시간 안에 완독 했다. 장진영 작가의 ‘치치새가 사는 숲’은 내 문체에도 큰 영향을 줬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뒤늦게 읽은 ‘어린 왕자’도 인생관에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데미안’이나 ‘정의란 무엇인가’가 재미없을 수 있다. 끝까지 못 읽을 수 있다. 반면 누군가에게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흥미로운 작가일 수 있다. 그 책들을 끝까지 읽지 못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모든 분류는 ‘나’이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고 책 한 권을 지속할 수 있는지 여부는 나와 이 책의 궁합을 증명했다. 즉, ‘지속가능성’은 나와 어떤 대상이 잘 맞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다.
나와 맞다는 것. 이 개념은 진로 분야에서 ‘적성’이라고 불린다. 선생님들이 적성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마다 막막하기만 했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좋아해야 적성인지, 내가 얼마나 잘해야 적성인지,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이 길이 과연 내 길이 맞는지 확인하는 방법을 그 누구도 자세히 알려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꾸준히 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적성이라는 사실을 안다. 당장 끌리는 것에 도전해 보고, 재미없는 것은 탈락시키며, 꾸준히 할 수 있는 것만 남기면 된다. 그럼 나와 잘 맞는 것들만 내 인생에 남게 된다. 상상만 해도 충만하다. 이것이 나다운 직업을 가지는 법이다. 최고의 직업을 가지는 법이다. 진로 분야에서 나아가 인생에도 적용할 수 있다. 사실 진로와 인생은 분리하기 어렵다. 인생이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중 진로는 중요한 선택에 해당할 뿐이다. 당장 끌리는 것을 실천하고, 꾸준히 할 수 있는 것을 지속하기. 이는 엄밀히 말해서 진로를 넘어 선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즉, 인생 전반의 선택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선택을 한다면 나다운 인생까지도 살 수 있다. 내 인생이 나로 온전해질 수 있다.
: 미완은 곧 완전이고, 실패는 성공에 필연적이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사람은 그럼에도 불안할 것이다. “내 선택이 사실은 적성이 아니었다면 어떡하지?”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다. 첫 번째, 그 선택이 적성이 아니었다면 다음 선택으로 그저 나아가면 된다. 무언가라도 해보지 않으면 나에 대해서 알기 어렵다. 그렇기에 뭐라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시작할 수 있다.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초반의 선택은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렇게 실패하면서 나에 대해서 잘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실패를 겁내면 안 된다. 성공은 수많은 실패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그 선택의 결과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나에게 가장 적절했던 선택일 수 있다. 사실 온전히 나만을 반영한 선택은 현실에 존재하기 어렵다. 나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 경제적 여건, 내가 태어난 지역 등 주변 요소들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현실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현실의 사항들도 조화롭게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요소들도 고려하면서도 나다운 선택을 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면 최선으로서 의의가 있다. 즉, 최고이진 않았어도 최선일 순 있다. 적어도 최선의 선택은 후회를 하지 않게 한다. 내가 떳떳할 수 있다. 현실 반영을 너그럽게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내’가 오히려 더 ‘온전한 나’일 수 있다. 그러므로 최선의 선택은 최고가 아니더라도 남의 시선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해 준다. 결국 내가 최대한으로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현실 반영을 너그럽게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내’가 오히려 더 ‘온전한 나’일 수 있다.” 이 표현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고 싶다. 다들 인생을 살다 보면 한 번쯤(?)은 큰 성취를 얻게 된다. 목표했던 대학에 붙는다든지, 목표했던 자격증을 딴다든지, 목표했던 기업에 취업한다든지 말이다. 그 찰나는 행복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 무뎌지기만 하면 다행이다. 오히려 그 성취가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그 성취가 싫어지기도 한다. 무언가를 해내고 나면 더 큰 것이 보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욕심 때문이다.
굳이 무언가 성공해 본 경험이 없어도 괜찮다. 그저 삶을 살다 보면 남의 떡이 더 커 보일 때가 있다. 남의 떡이 사회적 기준에서 내 떡과 동일한 수준일지라도 말이다. 뭐든 오래 하면 지루해진다. 당연한 이야기다. 초반에 뜨겁게 불타던 사랑도 권태기가 올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권태는 인간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귀여운 공격성’이라는 개념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인간 신체의 ‘항상성’과 관련된다. 귀여운 대상을 보면 올라오는 예쁜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반대급부로서 공격성이 상승하는 원리이다. 우리는 다리 한쪽이 잘려나가는 수준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때 순간적으로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그 고통에 대항하여 반대급부의 호르몬도 같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우리 몸도 균형을 잡도록 설계되었다. ’절대‘보다는 ’상대‘가 어울린다. ‘편중’보다는 ‘균형’이, ’완전‘보다는 ’불완전‘이 어울린다.
그렇다면 ‘완전함’이란 과연 실재하는가? 이제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 그저 판타지일 뿐이다. 완벽이란 적어도 인간에게는 존재할 수 없다. 정말 무언가 완벽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바로 불완전해질 것이다. 따라서 ‘불완전’을 수용해야 한다. 인생에서 마주하는 불편함을 기꺼이 즐겨야 한다.
나아가 어떤 불완전은 완전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인정할 수 있다.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완전함’은 결함이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이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다. 현실 속에서 말이 되는, 즉 실질적인 ‘완전함’은 ‘균형’ 또는 ‘안정’으로 치환 가능하다. 인간은 결함마저 수용해야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통념으로서의 ’완전함‘이 아니라 실질적 의미로서의 ’완전함‘으로 개념을 재정의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의미로서의 ‘완전함’이 현실 속에서 더 가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재정의를 해야 한다. 명목 GDP보다 물가를 반영한 실질 GDP가 현실을 더 잘 반영하므로 더 가치 있듯 말이다. 따라서 ’완전함‘은 ’균형적인‘ 또는 ’안정된’ 상태를 나타낸다고 다시 정의해야 한다. 이는 곧 ’불완전함‘도 의미한다.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맞춰도 완전히 이상에 도달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통념적 의미에서 완벽하다고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에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본인의 결함을 건강하게 수용하여 본인의 존재가 안정적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결함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통념적 의미에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즉, 현실적인 ’완전함‘은 불완전하다. 다만, 이상과 현실이, 강점과 결함이 균형을 이루어 안정된 상태인 ’불완전함‘에 국한해서 말이다. 이제는 '나’의 적성을 최대한 반영하면서 현실적인 요소들도 모두 고려하는 선택이 오히려 온전한 ‘나’로서의 판단일 수 있다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온전함도 ‘완벽’처럼 현실적으로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그 속에서 균형적일 때 말이 된다. 온전치 못해도 온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행복에 대한 이야기로도 확장할 수 있다. 예컨대 동료든 직장 상사든 누군가와 다툼이 있었다면 나의 존재는 불완전해진다. 분명 행복하기보다는 불행하다. 하지만 갈등 상황을 다면적으로 파악하여 상대방을 이해하면, 본인의 결함도 곧 수용하고 반성할 수 있다. 이는 건강한 상태 또는 안정된 ‘나’를 만든다. 그렇게 ‘나’는 온전해진다. 완전해진다. 불완전하지만 말이다. 온전한 ‘나’는 혼란으로부터 고요해진다. 완벽하지 않아 완벽하다. 불편함을 기꺼이 즐길 수 있다. 오히려 조금 불편해서 재미있다. 불편함과 편함의 균형이 잘 맞아 조화롭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존재할 수 있듯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친구 또는 직장 상사와 불화가 있더라도 ‘이 정도면 행복하다‘를 넘어 ’덕분에 행복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 완벽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나쁜 일도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는 수준 말이다. 물론 다면적인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누군가와 다투고서 ’완벽하다‘라고 말하며 행복해 한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완벽이자 완전이며 행복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그런 갈등이 없었더라면 완벽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 갈등은 적어도 없었다는 사실만을 보장할 뿐이다. 또한 우리의 인생은 길기 때문에 결국 비슷한 갈등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불편함이 연속적으로 우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편함을 마주해야 한다. 내면의 어둠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온전한 ‘내’가 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현실적으로 완벽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불편함과 안락이 적절히 조화된 행복 말이다. 따라서 온전한 ‘나’는 불편해서 행복하다. 이것이 진정으로 완벽한 행복이다.
나의 이야기가 정말 이상한 논리 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책 ‘데미안’은 ‘온전함’에 대한 나의 생각을 뒷받침한다. 이 말을 듣고나면 조금은 덜 이상해 보일 것이다. 대표적인 고전으로서 가지는 명성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헤르만 헤세의 힘을 빌려 나의 주장에 신뢰성을 더해 보고 싶다. 당장 다음 3장에서 이를 다루게 되면 통일성이 훼손된다.
다음 3장에서는 유퀴즈 EP.301 편에 소개된 ‘52세에 우주 공학 박사가 된 농부‘ 이야기와 진로관을 이어볼 것이다. 해당 방송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3장으로 넘어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