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세상이 규정되는 원리(2) 언론의 특성과 권력성
다음 내용은 알베르 카뮈의 책 ‘페스트’의 일부다.
“시의 문을 폐쇄함으로써 생긴 아주 중요한 결과들 중 하나는,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당한 사람들이 맞이할 돌발적인 이별이었다. …(중략)… 우리는 편지를 쓴다는 사소한 기쁨마저 거부당했다. 사실, 한편으로 이 도시는 평상시의 통신 방법으로는 나머지 다른 지역과 연락을 취할 수 없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편지가 전염의 매개물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각종 서신 교환을 금지하는 새로운 명령이 내려졌던 것이다. 초기에 몇몇 특권층들은 시(市) 문에서 보초병들과 접촉함으로써 그들이 외부로 가는 편지를 통과시켜 주기도 했다. 아직은 이 유행병의 초기였고 보초병들이 동정심의 충동에 꺾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될 시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민음사, 알베르 카뮈, 페스트, 93~95p.
이 대목은 사람들이 페스트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던 초반에, 즉 도시가 막 봉쇄된 시점에 등장한다. 이 글에서 봉쇄가 시작되자 권력이 커진 존재는 누구일까? 바로 시의 문을 지키는 보초병이다. 보초병은 평소에 특권층과 교류할 기회가 적었을 것이다. 특권층이 이들과 접촉할 이유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쇄 조치가 그들의 업무 권한을 강화했다. 그것은 평소와는 다른 힘을 발휘했다. 특권층이 서로 앞다투어 연락하게 만들었다. 권력은 이런 것이다.
이처럼 권력은 나만 가진 권한이 있을 때 발생한다. 그리고 그 권한에 대한 수요가 많거나 절실할수록 권력은 더 커진다. 즉, ‘차별성’이 권력의 핵심이다. 권력은 봉쇄된 지역의 문지기 같은 것이다. 권력이란 권한의 힘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세계 최대 패권국인 미국을 떠올려보자. 혹자는 그 비결을 ‘기축통화’에서 찾는다. 기축통화는 다른 국가가 가지지 못한다. 달러만이 가능하다. 기축통화로 인해 차별성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차별성은 곧 권력을 창출했다. 다른 누군가는 패권의 이유를 ‘세계 경찰’이라고 말한다. 보통은 자국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타국의 문제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미국은 자국과 무관한 외부 문제에 굳이 비용을 들여가면서 세계 질서 유지에 공을 들였다. 물론 의도는 알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그 대가로 최대 패권국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다른 국가와 달랐다. 세계 경찰 역할은 이러한 차별성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차별성은 역시 권력을 창출했다. 또 다른 사람은 그 비결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방력’에서 찾는다. 이 또한 차별성에 해당한다. 이외에도 미국의 세계 최고 패권국 비결을 설명할 수 있는 다양한 요인들이 존재한다. 이 요인들 모두 분명 ‘차별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질 것이다. 이처럼 권력의 핵심은 ‘차별성’이다. 언론의 권력도 다르지 않다.
언론은 정보의 문지기다. 이 문장 하나만으로 언론의 권력성을 벌써 이해한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앞서 저널리즘을 설명하며 언급했듯, 언론은 하루 동안 일어난 수많은 사실들 중 가치 있는 사안을 선택한다. 언론이 선택하지 않아 탈락한 사실은 우리가 알 수 없다. 세상에 존재했는지조차 모른다. 벌써부터 권력이 느껴진다. 한번 상상해 보자. 이 세상에서 휴대폰과 신문이 없어졌다고. 그러면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난 일만을 간신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마저도 발이 넓지 않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늦게 알게 되거나 아예 듣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제 대통령이 무엇을 했는지, 요즘 국회의원이 법은 만드는지, 트럼프가 일본에 관세를 얼마나 부과했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보의 문지기도 좋지만, 언론은 우리 인간의 감각기관에 비유해도 지나치지 않다. 언론이 감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어떠한 정보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눈, 코, 입, 귀, 손 중 하나가 기능을 상실하면 일상생활조차 힘들어지는 것처럼, 국민의 감각기관인 언론이 기능을 상실하면 국민의 삶에 분명 치명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언론은 이토록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거대한 권력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언론 권력 중에서 이 측면은 오늘날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 비중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바로 통신 기술의 발달 때문이다. 정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이다. 어떤 사건이 터져도 방송국 뉴스보다 X(구 트위트)에서 더욱 생생하고 다양한 현장 자료를 확보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생방송 동시접속자 규모나 영향력, 심지어 보도의 질적 측면에서 유튜브를 기반으로 하는 언론이 기성 언론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언론의 권력이 아주 축소되었다고 볼 순 없다. 권력의 크기를 결정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특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론의 핵심 역할이 무엇일까? 십중팔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론 형성’이죠. 영어를 잘한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아젠다 세팅(Agenda Setting)’이죠. 맞는 말이다. 언론은 대중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한다. 그 소식은 자연스레 여론을 유도하게 된다. 대중도 그 사안을 보고 생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현상이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민감할수록 여론 형성의 규모는 커진다. 다만, 어딘가 주체적이어야 할 것만 같은 ‘역할’이라는 표현은 마치 물리 법칙처럼 상식적인 ‘현상’이라는 표현과 어울리지 않는다. ‘역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려면 ‘저널리즘’에 다시 주목해야 한다. 각 언론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그 사실, 또는 한 언론사의 고유한 저널리즘에 의해 선택 받은 그 사안은 해당 언론사의 의도대로 여론을 형성하게 된다. 오해하면 안 된다. 이 의도는 주제 또는 아젠다를 말한다. 특정 방향으로 여론을 이끈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언론사의 저널리즘 필터에 의해 중요하다고 판단된 의제가 국민에 도달하면, ‘의도된 주제’로 공론장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제 좀 역할답다. ‘의도’라는 표현이 주체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언론인은 이것이 사회를 천천히나마 좋은 방향으로 바꾼다고 믿는다. 이러한 만족감에 사명감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 전반을 본인이 원한 주제 아래로 묶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상당한 권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여론 주도’라는 개념어를 도입하고 싶다. 언론은 사실 여론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여론을 주도하기까지 한다.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말이다. 가공 단계의 저널리즘에서는 특정 시각이 보도에 반영되기 마련이고, 이렇게 주관이 개입되었음에도 대중은 기성 언론에 대한 막연한 신뢰에 기반하여 이를 온전한 사실이라고 수용하기 때문이다. 즉, 정보 수용자는 정보 생산자의 시각을 답습하기 쉽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인지를 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심지어 그것이 온전한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오류를 수정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만약 정보 생산자가 정치적 목적을 의도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 방향으로 여론을 충분히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앞서 말한 2장을 쓴 계기이자, 언론의 막강한 권력성을 담보하는 특성인 것이다. 조선일보와 YTN의 사례로 언론의 ‘여론 주도’ 특성을 자세히 살펴보자.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