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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때그대 Oct 28. 2020

#6. 이건 좀 자신없는데

  둘째아이를 출산한 후 나는 다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정확하게는 내 경력을 살린 조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슬프지만 인정해야했다.

 공기만 바뀌어도 울고 엄마랑은 한 뼘도 떨어지지 않던 아이가 첫째다. 그 개복치를 작은 사람으로 빚어내느라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이미 직감했던 일이다. 이제 둘째까지 있으니 안부를 궁금해하던 사회 친구들도 연락이 뜸해졌다.


 다시 일 할 기회가 온 건 첫째가 네 살 무렵이다. 지인의 회사에서 아이 하원시간까지 짧은 근무를 할 수 있는 자리를 주어 첫 출근하기 일주일 전에 둘째가 자라고 있음을 알았다. 기다리던 아이였다. 유산을 하지 않았다면 셋째였을 생명이 안전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아가야, 하필 출근 일주일 전이라니. 묘하게 서운해지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솔직하게 회사에 소식을 전하고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았던 것 같다. 슬퍼서가 아니라 이 상황에 어울리지않는 마음,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에 확 젖어드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는 눈물이었기 때문이다.


 일을 하는 동안에 혹은 일을 못하게 되어도 '아이 때문에' 라는 이유는 스스로에게 불문이었다. 프리랜서로 집에서 작업 가능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더욱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는 자존심을 여태 잡고 있는 거다. 전화 회의 중에 아이가 엄마를 부르거나 울면 검지 손가락을 세워 쉿 제스처를 하고 무섭게 노려 보았다. 들키면 안되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못난 자존심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아이들은 업무 통화중에 말을 건다. 빨간 색연필이 쇼파 밑으로 굴러갔다거나 사과를 깎아달라는 둥 내 보기엔 당장 급하지않은 말을 급하게 전해준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아이들 목소리가 끼어들어도 웃으며 기다려주는 파트너들이다. 때로는 통화 상대와 인사를 나눌만큼 아이들이 자랐고, 나는 여유가 생겼고, 파트너와는 신뢰가 쌓였다.

 급히 대면 회의가 필요했던 어느 날, 5개월 된 작은 아이는 어쩌나 했더니 여태 애 봐줄 이웃 하나 사귀어두지 않고 뭐했냐는 말을 했던 사람이다. 너도 결혼해서 애 낳아봐라. 속으로 욕을 삼키고 워킹과 맘을 분리하는 게 나의 최선택이었다.


 낮에는 애 보고 밤에 애 자면 일 하는 나는 주육야업 4년차 워킹맘이다. 출퇴근이 없으니 제주살이를 결정하는데 일은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그만두라하면 그만두지 뭐. 용감하게 큰 결정을 하고 나니 나머지 작은 걱정들은 대의를 따르는 군사들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용기의 방향으로 따라오더라.

 중요한 프레젠테이션 일정이 잡히면 출장을 가야하는 게 남은 숙제인데, 양가 어머니를 제치고 나를 불러달라는 친구들이 있다. 제주에 오니 서로 아이들을 봐주겠다고 긴급보육자가 줄을 선 꼴이다. 하지만 아직 한번을 써먹지 못하고 있다. 나 혼자 우아하게 정장차림으로 비행기 타고 출장가는 기대를 하고 있는데 말이다.

 코로나19로 프레젠테이션이 취소되거나 온라인 진행으로 바뀌고 있다. 온라인 발표가 있는 날, 아랫도리는 홈웨어 반바지 차림으로 상체만 단정하게 차려입고 드레스룸으로 출장을 간다. 조명이 제일 좋고 방음이 잘 되고 와이파이도 잘 터지기 때문에 드레스룸에 노트북을 셋팅했다. 아이들에게 거실에서 조용히 놀 것을 약속받고 과자를 넉넉히 꺼내주었다. 궁금해서 불쑥 들어올까봐 헤드셋을 장착한 채로 안녕하십니까 시연해 주니 인사만 했는데 멋지다고 물개박수를 쳐준다. 이 녀석들이 심사위원이라면 정말 좋겠네.


 출퇴근 시간이 없고 사무실과 집의 경계가 없다는 것은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뜻이다. 솔직히 육아와 살림을 잘 해낼 자신이 없고 일에서 대단히 성공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저 두 마리 토끼를 느슨하게 잡아두고 스스로 위로하는 데 써 먹는 중이다. 나는 일하는 엄마니까. 나는 엄마인데 일을 하니까. 비슷한데 다른 말 속에서 워킹과 맘 사이의 균형을 잡고 있다. 다시는 못난 자존심에 무너지지않도록.


  아이들에게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 시기는 반드시 지나간다. 하지만 생각보다 길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지치지 않으려면 너무 애쓰지 말아야한다.


 어느덧 긴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이 나를 찾지않을 때 내가 헛헛함에 슬프지 않기를 바란다. 자아가 독립한 아이들을 기꺼이 인정하고, 그때는 내가 나를 보살피며 하고픈 무엇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기를. 그 시간이 밤이 아니라 낮이기를. 오늘처럼 일이 없는 밤에는 제발 일찍 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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