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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때그대 Oct 23. 2020

#5. 사는 곳을 바꿀까 나를 바꿀까

 서울에서 나는 도망갈 곳을 찾고 있었다. 여행을 갈 수도 없고 여행으로는 풀리지 않을 답답증에 잠을 설친지 반년이 다 되어갔다. 딱히 안되는 일은 없지만 기분좋게 잘 되는 일도 없었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은 화장실 가서 힘 쓰는 것 뿐. 그것조차 마음대로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고. 친구에게 상담을 했다가 핀잔을 들었다. 나는 심각한데 네가 무거운 내 마음을 가볍게 보는구나 싶어 맘 상한 채 며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도망가고 싶었다. 나를 모르는 낯선 곳에 가서 다 괜찮은 척 하고 싶었다.


 제주는 도망가기에 아름다운 곳이고, 코로나19는 도망의 핑계로 맞춤이었다. 거기에 아이들을 위해서 라는 이유가 붙으면 나는 현명하고 대범한 엄마로 변신되는 마법의 섬. 제주살이를 결정하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일번은 나였음을 고백한다.


 누구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사람이 싫어졌을까. 마흔이면 그럴 나이라던데 그 말은 또 무슨 뜻인지. 내가 꼬인 건지 듣는 사람이 꼬인 건지 말을 이어가기 불편해지는 것이 다 내 탓 같았다. 그럴수록 내 마음과 내 가족 그리고 내 상황을 더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거리두기 덕분에 칩거하는 게 당연해지고 사람들을 피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닌 게 되면서 비뚤어진 마음도 집에 숨겨둘 수 있는 것이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누군가를 떠올리면 시익 웃음이 나면서 보고싶어지고, 그도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면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곤했다. 의식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흐르는 친구랑만 소식을 나누었다. 떠오르지 않거나, 떠올랐지만 보고싶지 않거나, 보고싶지만 그 친구가 반기지않을 것 같으면 이만큼 멀어지는 것이다. 이 느낌은 순전히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 있다. 친구는 아닐 수 있겠지. 하지만 내 마음이 시릿하게 느껴지는 기운을 거스를 수는 없지않나.

 보고싶다고 말하는 것이 망설여지는 사람들과 멀어졌다. 멀어지는대로 그냥 두어볼 작정이다. 이제부터 나는 관계에 속태우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

 

 우리가 살아온 공간이 기억하는 내가 있다. 몸이 이 공간에 있는 한 익숙한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 관성을 찾는 기분이 든다. 가족들이 다 자는 달밤에 내가 가구배치를 바꾸고 있다면 무언가 깨달았거나 어떤 고민에서 마음을 정했다는 뜻이다. 밤이라 소리 내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힘을 쓰는 자신이 참 유별나다. 왜 꼭 밤인지 그건 나도 모를 일이다. 가구배치를 바꾸어 공간을 다르게 채우면 나는 어제와 다른 내가 되는 거다. 나의 결심을 오래 지키겠노라고 또 결심하는 나만의 의식 같은 것이다.


 제주에 갈까말까 깊은 고민을 시작한 5월에만 거실이 두 번 바뀌었다. 소소한 변화를 합치면 세 번이다. 가는 것으로 마음은 진작 붕 떴고, 책장을 옮기면서 아이들의 교육방향을 정하고 식탁을 돌리면서 내 주변을 정리했다.

 밤마다 유난을 떨더니 아예 사는 곳을 옮기는구나. 피식 웃음이 난다. 기대가 된다.


 넌 참 피곤하게 산다. 누가 말했더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피곤하게 살아보려고 한다. 사는 공간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새롭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기운을 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힘들 때 이야기 들어준 친구들, 무얼하든 믿어주는 가족. 그들에게 여기 아름다운 제주에서 편안히 쉬어갈 공간을 내어주겠다. 도망치는 심정으로 사는 곳을 바꾸니 나의 사람들에게 마음을 갚을 기회가 주어진 것 같은 기쁨이 온다.


 보고싶고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들이 마구 떠오르는데 너무 늦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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