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캡슐 커피 머신이 갖고 싶었다. 하루에 커피를 세 잔 정도 마시니까 카페로 나가서 사 먹는 가격과 비교해 계산하면 머신 값은 두 달도 안걸려 채워지겠다. 옳지. 충분히 합리적인 소비다. 아니다. 카페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커피 맛도 분위기도 아닌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집에 커피 머신이 있다고 내가 안나갈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늘 집으로 초대할 수는 없으니 캡슐 머신은 낭비라고 결론 내렸다.
딸 아이는 우리집 정수기를 바꾸자고 했었다. 부산 할머니 댁에 있는 것 처럼 한번 누르면 물이 딱 한 컵씩 채워지는 정수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내가 정수기를 선택할 때도 커피 머신에 그랬듯이 똑똑한 이유들이 있었다. 주방이 좁기 때문에 슬림한 디자인을 원했고 2리터짜리 물통을 쓰고 있었기에 물이 한 잔씩 나오는 기능은 필요 없었다. 오로지 정수 기능만 가진 모델이 가장 심플하고 렌탈 비용도 착했다. 원래는 정수기 자체를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기능이 의미 없고 눈에 거슬리지 않는 몸체가 중요했다.
뭐 하나 사는데에 내 생활습관과 나름의 가치를 고려한 결정이니 만족해야할텐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물통에 물을 채우려고 정수기 꼭지를 꺾어 놓고 깜박 잊어서 주방 바닥이 물바다가 된 게 한 두번이 아니다. 캡슐 머신은 안사기로 해놓고 에스프레소 머신은 왜 산건지 아무리 콤팩트라도 원두 넣고 내리고 씻기 귀찮아서 그냥 믹스커피를 타 마신다.
이쯤되면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냥 생각이 취미라는 걸 인정해야겠다. 나를 조금 아는 사람들은 내가 쓸데없는 생각으로 괜한 에너지를 쓰느라 살이 안찌는 거라고 말한다. 이것도 인정한다.
아이들과 제주로 살림을 옮긴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와, 부럽다' 했고, 가까운 지인들은 '아이고, 신경쓰느라 얼마나 힘들었어' 소리가 먼저 나왔다. 십년 전에 '저 결혼해요' 하면 '축하해' 하는 목소리만으로도 찐 내 사람과 흘러가는 사람이 마음에서 저절로 구별되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어떤 고민과 걱정 그리고 생각 끝에 제주로 오게 되었는지는 따로 풀어내기로 하고 오늘은 살림살이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다.
제주 생활이 빠르게 안정된 이유는 산, 바다, 하늘, 바람이 아니라 각자 원하던 살림 덕분일지 모르겠다. 제주에서 나는 캡슐 커피 머신을, 연후는 정수기를 애정하고 있다(훈이는 TV). 제주 집의 기본 옵션 덕분에 맛있는 커피를 매일 맛 보는 재미가 좋다. 어차피 제주에는 커피 친구가 없어 나갈 일도 없고 말이다. 물을 한 잔씩 채워주는 정수기는 나도 마음에 든다. 한 컵도 나오고 반 냄비도 나오고 찬물도 나오니 좋다.
서울에서 가져온 주방 살림은 아이들이 자기 것이라고 챙기는 숟가락 젓가락과 안 깨지는 플레이트가 전부다. 에어프라이어는 보자기에 묶었다가 도로 내려놓았었다. 짐스럽고 유난스럽게 보일까봐 두고 온 살림이다. 나는 도대체 누구 눈치를 보는 것일까. 내가 내 눈치를 보느라 안 챙긴 에어프라이어를 사 보내준다는 J언니의 전화가 왔다.
"아이 키우는 집에 에어프라이어는 꼭 있어야 해. 하루 이틀 여행간 것도 아니면서."
거절없이 냉큼 주소를 불렀다.
하고 싶은 것에 이유를 붙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먹고, 가고, 사고, 하면서 살자(그 첫번째 행동이 제주살이다). 에어프라이어로 크로와상을 굽고 싶었다. J언니가 함께 보내준 냉동 생지는 한 여름에 배 타고 오느라 녹다 못해 도로 반죽이 될 지경이었다.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이유는 됐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며칠 인터넷을 헤맨 끝에 제주에서 크로와상 냉동 생지를 만드는 공장을 찾아냈다. 제주에 있는 호텔과 카페에 납품하는 공장이라 가정집에 배달해줄 수 없다고 한다. 괜찮아요. 내가 가면 되니까요. 사장님은 소분해서 팔지 않으니 큰 아이스박스를 가져오라고 당부하셨다. 크로와상 냉동 생지 80개를 담아왔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적극적으로 행동해서 얻은 맛. 바로 구운 겉바속촉(겉은 바삭 속은 촉촉) 크로와상은 정말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