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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때그대 Oct 06. 2020

#3. 노을은 정신건강에 이롭다.

 서울에 사는 동안 매일 아침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했다. '심각'이 아니라면 잠깐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종일 닫아두는 하루. 거실에 키가 큰 초록나무를 세 그루나 둔 것으로 맑은 공기를 가졌다고 착각하는 날들. 그 중에 공기정화 능력이 좋다고 소문난 아레카야자는 화분받침에 바퀴가 달려 이 방 저 방 옮겨다니느라 가장 바쁘다.

  창 밖은 마을을 잇는 초록버스들이 아리랑 고개를 더디게 넘고 배달 오토바이는 언덕 오르느라 저 밑에서 부터 속력을 낸다. 앞 동이 시야를 가리지 않는 것과 한강은 아닐지라도 멈추어 있지 않은 뷰를 가진 것이 좋았다. 창을 열면 오토바이 소리가 날카롭지만 자주 열지 않으니 문제 없었다.


 "저 차 소리가 파도 소리라고 상상해 봤어."

 제주집 이사를 기대하는 딸 아이가 말했다.

 사람이 얼마나 생각이 앞선 동물인가. 제주로 간다고 결정한 후 부터 이미 영혼은 서울에 없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창 밖 풍경은 번잡스러운 내 머리 속 같았다. 분갈이 시기가 지나 작은 화분에 뿌리가 갖힌 나무는 힘겹게 서 있는 내 모습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거실 앞 뒤 창을 활짝 열어 바람길을 낸다. 딸 아이는 진작에 등교 준비를 마치고 쇼파에 앉아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 한 장을 주문했다. 엄마를 깨우지 않고 혼자 할 일을 하는 초등 인간을 내가 낳았다니. 차 소리가 없고, 남편 출근 준비 소리도 없고(나는 남편 출근을 챙기는 아내가 아니란 얘기), 새벽녘에 깨어 우는 아기가 없는 아침 잠은 꿀이다.

 오늘 일몰 시간은 오후 6시 23분이다. 제주에서는 매일 미세먼지 수치 대신 일몰 시간을 확인하고 있다. 핸드폰 바탕화면에 꺼내두던 미세먼지 어플은 이제 서울 친구들에게 안부를 물을 때만 필요한 어플이 되어 구석 폴더에 깊이 넣었다. 오늘은 노을이 보이는 놀이터에서 놀다가 어두워지면 간단히 고기국수를 먹고 남편을 마중가야겠다. 이사 온 7월 보다 일몰 시간이 1시간이나 빨라져 간식 시간이 생겼다.


7월에는 낮이 길어 7시 30분이 넘어서야 해가 떨어졌다.

  

 시간은 내가 주인이고 내가 통제하며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천성이 게으르지만 깨어있는 동안은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웁던 날이었다. 그렇게 종일을 종종 거리면 밤이 되어도 머리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느라 잠을 쉽게 자지 못했다. 언제 잤는지 모르겠고 어떻게 일어나는지 모르겠는 삶을 스스로 기특하게 여기던 가엾은 나였다.

 꿀잠을 자고 상쾌하게 일어나 시작하는 하루는 이룬 것 없이 충만함을 주고 있다. 신기한 노릇이다. 잠을 줄이고 끼니를 걸러가며 이루어 내는 짜릿한 성과가 나의 에너지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출근하는 워킹맘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시간을 시간 그대로 느끼는 것을 자연스럽게 해내고 싶어졌다. 지금 이 시간을 즐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해낸다'고 말하고 싶을 만큼 아직은 어색하고 그마저 바쁘다. 아름다운 노을을 보려면 바쁘게 준비해야 한다. 아이들을 달래어 오늘 엄마의 계획을 브리핑하고 외출 시간을 정하는 것이 시작이다. 집에서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을 꾀어 밖으로 나오는 것이 제일 어렵다. 이럴려고 남편없이 제주에 왔나. 나는 참 고생을 사서 하는 스타일이다.


  오늘 남편이 온다. 금요일에 퇴근하면 제주로 내려오고 월요일 아침 비행기 타고 서울로 출근하는 남자. 혼자 지내는 사흘 밤이 몹시 헛헛하다고 한다. 나는 외로울 틈 없이 엄마 아닌 엄빠로 살다가 목요일이 지나면 일주일이 끝났구나 한다. 한 주가 월화수목 밖에 없는 것 처럼 짧다. 남편은 내가 지칠 때 나타나는 히어로이자 마감 때 찾아오는 단골 손님 같다. 반가움과 피로함을 동시에 주는 나의 주말 친구가 온다.


 남편을 마중할 때 심드렁 해 보이지 않으려고 신경쓴 다는 걸 그는 알까. 그렇다고 매번 호들갑을 떨 수도 없고 말이다. 마음을 다스리는데 석양이 좋더라. 내 시간 없이 월화수목까지 너울을 타던 마음이 마지막에 가장 붉게 물들다 금새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면 평화가 온다. 구름이 있는 날은 구름 그림자가 핑크에서 보라빛으로 바뀌는 순간을 볼 수 있다. 내가 아는 색깔 이름들을 다 불러도 모자란 모든 빛이 하늘에 있다. 하늘이 노랗다가 붉었다가 짙은 보라로 바뀌는 시간에 남편은 구름 위에 있을 것이다. 어둠이 깔리고 내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오면 온화하고 반가운 표정으로 남편을 맞이할 수 있다. 이것은 연기가 아니다.


하늘을 보자. 남편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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