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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때그대 Sep 14. 2020

#2. 기념일을 기념하는 기념일

 남편이 깁스를 풀었다.

 내 속이 다 시원하다.

 매일 홈트를 하고 일주일에 네 번은 유도로 몸을 굴리는 남자인데 4주 동안 꼼짝없이 몸을 사려야했다. 그 4주 동안 나는 남편의 불편한 왼 발 보다 빠르게 움직이려고 애썼다. 결혼생활 10년차. 신혼 한 달 동안 간단한 아침을 차려 배웅한 이후 처음이다.(남편은 기억조차 못하는 신혼 한 달의 아침) 평소라면 사과 하나를 뽀득하게 씻어 반쪽은 자기가 먹고 나머지 반쪽은 4등분 하여 뚜껑있는 그릇에 담아 우리 일어나면 먹으라고 냉장고에 넣어주고 가는 남자. 깁스를 풀 때까지는 내가 함께 일어나 사과 반쪽과 홍삼 한포를 챙겨주어야지. 전날 밤에 불려둔 누룽지가 있다면 뜨끈하게 끓여 고소한 참기름으로 마무리한 아침을 낸다. 몸이 피곤한 것 보다는 투덜투덜 소리가 먼저 나오려는 것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어이없이 웃기고 고되었다. 아픈 사람이 더 힘들테니 소리 내지 말자.


 제주살이를 결정하고 며칠 후에 발가락 뼈가 골절되어 남편이나 나나 황당 그 자체였다. 아이들과 내가 제주로 내려가면 남편이 혼자 있게 되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미안하고 고맙고 걱정되는 마음을 다 풀으라고 다쳤나. 수술없이 조심하면 회복되는 딱 그만큼의 부상이라 감사했다. 매일 아침을 챙겨 주고 양복과 셔츠, 속옷 그리고 양말 한 짝을 제일 위에 포개어 놓으면 눈은 감겨도 마음은 좋았다. 어느 집은 당연한 아침일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누구 하나 다쳐야 볼 수 있는 비정상적인 아침이다.


 깁스를 완전히 푸는 것을 보지 못하고 제주로 살림을 옮겼다. 제주로 보내는 차량 탁송일정과 비행기 티켓을 바꾸지 말고 예정대로 하라고 남편이 내 근심을 덜어준 덕분이다. 이제 목발을 짚지않고도 얼마나 잘 걷는지 보라며 절름발이로 실룩거린다. 이삿짐 아닌 이삿짐을 싸고 탁송으로 보내는 차에 짐을 테트리스하는 것이 몹시 힘에 부쳤다. 힘 세고 든든한 것이 자랑인 사람이 하필 이럴 때 다쳐서 써 먹을데가 없는 내 남편.

절름발이로 매주 주말에 제주 숲길을 함께 걸었다.

 

당신 없어도 내가 알아서 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차례다. 무슨 외국가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 치과 검진을 받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했다. 샴푸, 치약, 세탁세제를 적당히 채워두고 다른 생필품들은 찾기 쉬운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음쓰카드도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방법이 RFID로 바뀐 후로는 한번도 안해봤을 남편은 버리기 귀찮고 싫어서 밥을 안 해먹을 거라는데에 내 한달치 용돈을 건다.


 한 여름에 제주로 들어와 여행을 온 듯 뜨거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스크 없이 산책을 하고 아이들 목젖이 보이도록 깔깔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행복이다. 이것이 그토록 바라던 일상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고서야 애월읍사무소에 들러 전입 신고를 했다. 아이 전학에 필요한 서류도 받고, 등본을 떼어 애월 도서관 회원카드를 만들었다. 아이들은 책 두 권씩 나는 한 권을 빌려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전화했다. 축하받고 싶은 시작의 날이다.


 남편은 깁스를 풀었고, 우리는 도서관 회원카드를 만들어 첫 대출한 날.

 멀리서 핸드폰 너머로 서로의 오늘을 축하하고 응원하며 충만하게 쁨을 나누었다.

 종일 가벼운 비가 오락가락 하다가 어둑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하루가 끝나가는구나 생각하는데 부산 어머니 문자가 띵똥 온다.

 '결혼기념일인데 부부가 떨어져있어 우짜노.'

 세상에. 우리 둘 다 완전 홀랑 잊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우리 오늘 결혼기념일이래. 하며 깔깔 웃었다.

 

 우리의 오늘이 행복했으니 되었지않나. 우리의 오늘은 특별하지 않아도 기념할만한 소소한 일들을 서로 축하하고 응원하지 않았나. 기념하고 감사할 것들은 우리 하루에 이렇게 매일 있는 것이지 않나. 이런 작은 기쁨들을 더 많이 나누자꾸나.

 라는 개소리를 나누며 미친 듯이 웃었다.


 우리의 기념일을 기념하는 기념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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