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태풍이다.
그래도 두 번 겪어봤다고 꽤 침착한 것이 스스로 대견하다. 여러 매체를 통해 태풍 경로를 확인하고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을 시간을 가늠해 본다. 새벽 3시. 아이들이 잘 시간이어서 다행이다. 지난 번 '마이삭'때 처럼 정전이 되어도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캠핑용 랜턴을 완충해 두었고, 웬만한 비바람에도 아이들은 깨지 않을 시간이다. 태풍 '하이선'은 제주의 오른쪽으로 지나가니 북쪽에서 쎈 바람이 불어오겠구나. 와, 나 이제 이런 것도 생각할 줄 아는 도민이다!
저녁 9시 무렵부터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아이들은 저녁 밥을 다 먹고 토스트 간식도 먹었다. 남매는 샤워인지 물놀이인지 여태 목욕탕에서 노닥거리고 있다. 아마도 씻는 건 끝난 모양이니 이대로 단수가 되어도 괜찮다. 물과 전기가 동시에 끊겼던, 고작 5일 전에 왔던 무서운 태풍은 나를 아주 빠르게 훈련시켰다. 또 정전이 되면 나는 복구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지만 손 닿는 곳에 랜턴이 있고 겁나지 않은 척 하며 아이들을 끼고 재울 마음의 시나리오가 준비되어 있다.
지금 당장 어둠이 오면 핸드폰 프레시를 켜고 아이들에게 말을 걸며 뛰어갈 것이다.
"놀랐지. 괜찮아. 엄마가 가고 있어."
미리 꺼내둔 수건으로 아이들을 감싸 거실 쇼파로 데려와 앉혀야겠다. 하얀 불빛의 랜턴과 노란 불빛의 랜턴을 모두 켜서 아이들 손에 하나씩 쥐어주면 안심하겠지. 남편에게는 전화하지 않는 게 좋겠다. 지난 태풍 때 겁을 먹은 둘째 아이가 아빠한테 안기고 싶다고 울어서 통화를 했는데 목소리 밖에 들을 수 없는 걸 더 서러워했다. 영상통화인데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아주 오열을 해서 달래는데 애를 먹었다.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난 후에 침착하고 우아하게 내 걱정은 말라고 전화하고 싶다. 나는 어째서 남편에게 씩씩하고 알아서 잘하는 아내로 보이고 싶은지 모르겠다. 잔걱정과 잔소리를 미리 차단하고 싶은 건지, 원래 정말 나는 다 잘 하는 건지. 훗.
아이들이 욕실에서 물놀이를 하는 동안 태풍 전 마지막 커피 한잔을 내렸다. 포트가 끓어올라 정점에서 틱 하고 전원이 내려가는 걸 보고 피식 웃음이 났다. 이제 진짜 정전이 되어도 괜찮다. 나는 커피물도 준비되었으니까.
바람이 점점 거세게 불어온다. 북향 주방 창문과 다용도실은 비바람 소리로 난리가 났다. 누군가 창으로 물건을 집어 던지는 것 같은 소리다. 비가 쏟아지는 것이 아니고 물덩어리가 날아다니는 것이 눈에 보이는 진기한 광경. 더 신기한 것은 남향 베란다 앞에서 보면 비교적 평화롭게 쏟아진다는 것이다. 태풍이 북쪽 바다에서 거센 바람을 휘몰아 칠 때 안방 화장실 변기물도 찰랑찰랑 흔들린다.
남향으로는 바람이 세지않다. 비소리를 들으며 <비오는 제주 숲> 이란 제목으로 다섯살 둘째가 그린 그림.
내일 큰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 태풍으로 인한 온라인 수업이라니 제주는 아침까지 태풍 영향권에 있을 모양이다. 이럴줄 알고 마트에서 과자, 우유, 사과와 방울토마토를 넉넉하게 샀다. 차는 최대한 비바람을 직접 맞지 않도록 집 주차장 자리 중 동쪽과 북쪽을 막는 코너자리에 안전하게 세워 두었다. 이런 생각까지 하는 내가 대견해 미치겠다.
밖은 요란하지만 우리는 고요하다. 커튼을 닫고 두 시간짜리 폴킴 노래 베스트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참 편안해진다. 지난 태풍 덕이랄까 아이들은 우리집은 안전하다며 천둥소리에도 흔들림없이 놀고 있다. 이렇게 안전한 집을 고른 게 바로 엄마란다. 사실은 내가 불안을 못 견디기 때문이고 여기까지 와서 편리한 주변시설을 찾는 중인데 아이들을 핑계로 내 불안을 감출 수 있는 것이 나쁘지않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너무 빨리 커버리지 않으면 좋겠다. 불안할 때 마다 엄마를 불러주고 나를 안아주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