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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때그대 Feb 05. 2021

#15. 이름처럼 사는가

 내 이름이 너무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싫었던 건 아니지만 '나는 소연이구나' 딱 그것 뿐인 거다. 한자를 풀이해도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이름이다. 흴 소에 그럴 연. 희고 그렇게 뭘 어쩐다는건지. 심지어 어려운 이름도 아닌데 소영, 소현, 수연 다르게 쓰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이 삐죽해졌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마흔이 되도록 아니 앞으로도 평생 달고 살아야 할 것을 알았다면 어릴 때 차라리 잠을 더 많이 자고 키를 키웠을텐데.

 이름으로는 모자라 띠, 생년월일, 별자리, 혈액형. 안 파본 분야가 없다. 나중엔 물고기자리 여자, 물고기자리에 오형 여자, 물고기자리 여자이고 오형인 둘째. 가지가지로 엮어 나를 알아보는데 열중했던 시절이 있다. 어쩜 너무 잘 맞아. 하면서 읽었어도 뭐 하나 기억나는 단어가 없는 건 좀 허무하네. 금새 잊고 심심하면 또 같은 검색을 하는 이유는 재미있어서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부분을 꼬집어내는 것이 재미였다.

 몽상으로 그려가던 나를 누군가의 밑그림에 얹어보는 기분이랄까. 나는 내 자신이 몹시도 궁금했다.


 내 이름은 당시 유행이었는지 성 마저 흔해서 단박에 기억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는 짓도 가만가만하니 뭘로도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겠다.

 쉽게 지워지는 이름은 적당히 숨겨지는 좋은 점이 있다. 학창시절 선생님들이 출석부에서 아무나 불러 발표를 시킬 때 나는 이름으로 눈에 띄어본 일이 없다. 손을 드는 것도 싫고 지목해 부르는 것은 더 싫었던 시절에 얼마나 장점인가.


 인상적인 이름을 갖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내 이름은 나를 설명하기에 부족한, 애매한 뜻처럼 쏘왓인 상태가 답답했던 것이 아닐까. 나도 나를 감감 모르겠어서 이름이 기가 차게 이끌어주기를 바란 것이 맞겠다.


 가까운 친척 중에 성직자의 이름으로 불리우다 정말 성직자가 된 오라버니가 계시다. 외당숙모는 복중 아이가 태어나 성직자의 길을 가길 바라 이름을 따 지었다는데 그게 어디 바란다고 될 일인가. 어쨌든 돌고돌아 찐 사제가 된 스토리는 그야말로 소오름.

 이름에는 어떤 운명적인 힘 같은 게 있다고 믿던 내가 맞지않나!

 그렇다면 나는 계속 모호하게 그렇게 산다는 건가. 젠장.


 흐릿한 내 운명을 받아들이겠다. 생시와 이름으로 정체성의 키워드를 찾는 것은 욕심이었다.

 살다보니 정이 들고 발음이 부드러워 듣기 좋더라. 나를 불러주는 그 소리가 말이다. 날 때 부터 가진 이름에 차차 정을 붙인 다는 게 좀 어이없지만 나는 정말 그랬다. 키가 더는 크지않을 때 쯤 내가 소연으로 불리는 것을 이해하기로 했다. 이해. 깨닫고 알아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잔잔한 내 이름에는 뒤에 뭐가 붙어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실 웃음이 난다. 실장, 대표, 선생. 어떤 직함, 호칭이 따라와도 자연스럽지않나.

 작가보다 더 짜릿한 부름말이 있겠냐마는.

 하얀 도화지 같은 삶에, 그렇게, 무엇이든 그리라는 의미로 살아볼까보다. 뭐 억지로 갖다붙인 감이 있지만 어떻게든 알맞게 설명이 되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뇌를 가진 걸.


 제주에서 부캐(부 캐릭터)를 만들어볼까. 심심한 고민을 하다 여기까지 왔다. 누구 엄마로만 불리는 것 말고 내 이름을 들을 일이 없는 제주살이. 아는 사람도 없고. 알릴 일은 더 없고. 쭈욱 알듯말듯 애매하게 사는 것도 뭐 나쁘지않다. 그것이 내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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