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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때그대 Mar 18. 2021

#17. 두번째 스무살

 시동을 거는데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출발을 해야지.

 목적지는 저기지.

 가는 길에 여기 들러야지.

 가면서 이것을 먹어야지.

 언제까지 도착해야 하더라.

 미리 생각해 놓고도 찜찜한 부분이 없는지 다시 한번 짚어 보아야 한다.


 운전 이야기는 아니고 일을 시작할 때 이렇게 더디다. 머리에 내가 이제부터 써 내려갈 스토리의 흐름부터 스케치, 뼈대, 논리의 설계 등이 온전히 그려지지 않으면 시작하기가 그렇게 어렵다. 말하자면 남을 설득하는 글을 쓰고 문서로 만들어내는 것이 나의 일인데 스스로 그 흐름이 납득 안 될 때 한 줄 시작이 괴롭다. 어쨌든 이것은 밥벌이고 데드라인이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미룰 수는 없는 노릇.


 아이들이 모두 깊이 잠이 들면 식탁 한 구석에 노트북을 펼치고 의자에 다리를 포개어 올리고 앉는다. 이 자세가 편하니 바닥에 앉아 좌식 테이블을 쓰면 될텐데 그러다 눕고 싶을까봐 굳이 올라 앉는 것이다. 그리고 의자에 입혀둔 가디건을 어깨에 걸쳐야 한다. 여름에도 어깨가 한기를 느끼면 영락없이 몸이 아프기 때문이다.

 일할 자리에서 일에 임할 자세를 딱 잡고 SNS나 뒤적이고 앉았다. 한심한 짓을 하면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오늘은 여기 앉는 것 까지 해낸 것에 나 자신을 칭찬하며 한없이 빠져들도록 내버려둘 참이니까.


 생각이 반짝하고 물꼬를 트지 못할 때 몸을 끌어다 앉히고 일부러 새벽까지 깨어있는다. 몸에게 먼저 말을 걸고 준비를 시켜야 늘어지지 않더라. 며칠이고 이렇게 보낸다.

 엉덩이, 뇌, 손과 입에 각각 자아가 있는 듯 하다. 엉덩아, 너는 들썩이지 않고 자리를 지켜야 하느니라. 머리 속에서 일이 정리가 되면 손 너는 지체없이 다다다 옮겨야 한다. 뇌가 까먹거나 다른 생각으로 튀기 전에 말이다. 입에는 커피 혹은 쥐포 따위를 때때로 넣어줘야 모든 게 순조롭다.

 가장 중요한 역할은 뇌인데 엉덩이가 제 할 일에 집중을 못하면 금새 흐트러지는 유리멘탈을 가졌다. 그래서 입으로 주전부리를 먹어가며 일 머리를 끌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드디어 설계가 끝나 마음 단단히 먹고 시동이 걸리면 끝을 보고야 만다. 화장실도 참아가며 해가 뜨도록 집중의 끈을 잡고 무조건 전진. 결국은 엉덩이의 힘이란 걸 깨닫는 새벽이 된다. 엉덩이는 고단하고 머리는 개운하다. 다시는 밤을 새지 말아야지. 십 수년 째 해오는 다짐.


 체력이 약하여 공부든 일이든 지구력이 모자란 편이다. 때문에 한 번 시작하면 마무리까지 몰아서 하는 게 전략이 됐다. 집중을 놓치면 다시 끌어올리기가 너무 버겁기 때문이다. 누구는 독하다고 했고, 누구는 깡으로 버티다 훅 간다고 했다. 실제로 혼절을 한 것도 여러번이다.

 나는 완벽하게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내 작은 키 보다 커서 악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마음 먹고 시작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지도. 시작을 했다하면 온 기운을 쏟아내고 모자란 힘은 악으로 버티어 기어이 끝내야 하니까.



 내일의 에너지를 미리 당겨 쓰면서 얻는 타인의 인정과 스스로의 만족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다 갑자기 맥이 풀린 날이 있었다. 그럴듯한 평판 안의 나는 진짜인지 실은 그보다 모자란데 애써온 것이므로 가짜인지 물음표가 떴을 때, 탁 주저앉는 기분이었다. 더는 끌어다 쓸 기운이 없다 싶은데 밤새 해야할 일들이 쌓여있고 결과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고요한 밤이었다.

 그 때가 서른살.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이 질문이 불현듯 왜 떠올랐는지. 누구에게 물어볼 수 없고 스스로 답하지 않으면 안되는 물음 속에 갇혀 헤매느라 삼 일을 한 숨도 잘 수가 없었다.

 할 일이 많아요. 잠을 좀 자게 해주세요.

 수면제 몇 알 얻을 마음으로 찾아간 정신과에서 그냥 약을 내어주지는 않더라.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데 약을 받으려면 묻는 말에 답을 해야했고 그렇게 나의 여덟살 시절을 들여다 보았다. 깡 마르고 까만 피부에 목소리는 개미만한 키 작은 아이.

 2학년이었던 나에게 당시 담임 선생님은 "너는 이것만 해." 라며 꽃병에 물 갈아주는 역할을 주셨다. 학급 청소 역할 중 가장 간단한 일을 쉽게 끝내고 나는 '내가 힘 없고 약해서 무엇도 제대로 해낼 수 없는 아이로 보이는구나'라고 해석해버렸다. 애쓰기 시작한 게 그 때 부터다.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하는 열 살, 개미 목소리에 용기를 심어 손을 들고 목소리를 내는 열 네 살, 당당하게 무대에 올라 연극 공연을 하는 열 일곱 살. 찬찬하게 계획하고 연습하며 나를 갈아 담대하고 믿음직한 이미지로 빚어 온 학창시절이었다. 노오력을 켜켜이 쌓아 지금은 프리젠테이션을 업으로 하는 내가 기특하면서도 과부하로 브레이크가 걸린 게 서른 살 봄이다.



 제주에서 마흔을 꽉 채운 생일을 맞았다. 마흔이 되면 나는 내가 모든 면에서 프로페셔널해 질 것 같았다. 자신있었다. 그 놈의 노오력은 살살하고 생긴대로 살자고 마음 먹은 서른 살 봄부터 어서 마흔이 됐으면 하고 바랐다.

 사는 게 늘 꽃길만은 아니란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있나. 내 사람들에게는 힘들다 소리도 하고 솔직하자 했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에서 힘을 빼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알면서도 잘 안되지만). 남편과 늙어가는 시간을 상상하면서 서로를 챙기는 철 든 나이.

 망쳐도 겁내지 않고 즐겁게 살 자신을 두둑히 채웠다.

 이것은 마흔이 아니라 두번째 스무살이다.



 나의 아이들은 제주의 자연 안에서 어떤 자아를 설계할런지. 다른 사람의 기대나 시선보다 자기 자신을  알아보기를 바란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 긍정의 말을 많이 듣기를 소망한다. 여덟살의 나와는 다른 불꽃을 피우기를. 제주살이 결심의 숨겨진 이유였다.


 제주에서 이제 열 살, 여섯 살이 된 아이들을 보면서 깊숙이 눌러둔 나의 어린 시절을 위로하고 있다. 2학년 담임 선생님의 말이 나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아끼는 마음에 한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제서야 해본다. 지금 생각한 것을 그 때 했더라면. 누가 뭐래도 많이 놀고 제 멋에 취해보았더라면. 조금 설렁설렁 했다면 키는 더 크지 않았을까. 헐렁한 틈으로 재미난 취미도 찾아내어 반짝이는 스무살을 지나 마음이 윤택한 어른이 되었을까.

 아름답고 거대한 제주 산과 바다에서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하며 자라는 아이들이 자기 안의 막연한 두려움 따위 별 것 아니라는 힘을 얻고 있음을 본다. 한결 같으나 계절마다 색을 바꾸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않는 유연함. 대자연을 그저 바라보며 품 안에 사는 것 만으로 위로가 되고 또 힘이 되는 느낌은 초자연적이라는 말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진짜 나는 어느 쪽인지 아직도  모른다. 다만, 여태 크게 아프지 않고   왔다고 가짜 나를 진짜 내가 칭찬해줄 . 해넘이에 반짝이는 바다를 보면서 생각했다.

 유별난 사춘기 없이 스무살이 되더니 뒤늦게 자아를 애정하는 두번째 스무살이 되었구나.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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