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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때그대 May 07. 2021

#19. 이럴려고 제주왔나

 발을 꾹꾹 주무르는 손길에 새벽잠에서 깨어 남편을 공항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다. 여름이 가까워 벌써 동이 텄고 공항 가는 내내 떠오르는 해를 마주보고 달렸다. 눈이 시큰해서 아이들이 깰 때까지 잠시 누우려다 쇼파에 앉았다.

 금요일 밤에 제주로 와서 주말을 함께 보내고 아침 첫 비행기를 타는 월요일은 남편에게도 나에게도 피곤한 날이다. 아니, 남편이 더 고되고 마음은 훨씬 힘들 것을 안다. 헛헛함을 누르고 홀로 비행기를 타러 가는 마음이 어떨지. 경험해 보지 않은 나는 사실 다 안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남편 향수 냄새가 난다. 새벽 찬 기운을 덮으려고 가디건을 둘러 입고 운전을 했다. 공항에 다다라 남편은 내 머리를 쓸어주고 오른쪽 어깨를 살살 주무르며 조심히 가라고 인사를 했는데 그 때 니트에 가볍게 스민 향인가 보다.


 홀로 제주와 서울을 오가는 남편이 안쓰럽다 하면서도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다. 일요일 오후부터 미묘하게 예민해지는 모습이 못내 불편하고 아이처럼 구는 것 같아 우수워 보여 가볍게 여겨지도 했다.

 나는 뭐 매일이 힐링이고 좋기만 하겠나. 두 아이들 컨디션과 일정에 맞추어 내 몸과 마음은 양보하는게 당연해져서 괜찮아보일 뿐. 소소한 힘든 일 이야기하면 떨어져 있는 사람 마음도 편치않을까봐 씩씩한 척 하는 것은 왜 몰라주나 나도 섭하고 흥이다.

 그렇고 그런 새벽 배웅길이었는데 지금쯤 하늘 위에 있을 남편 냄새가 사악 감기는 순간 화악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거다.

 

 이럴려고 제주에 왔나.

 서울에서 아빠와 아이들이 매일 방귀끼고 도망치며 노는 게 나은 것이었을까.


 제주에 온 지 일년이 다 되어 새 집을 구해야 할 때가 왔다. 언제든 서울에 돌아가고 싶을 때 가볍게 떠날 수 있는 풀옵션 연세살이가 아닌 이제 우리집이다 싶게 마음을 잡아줄 집이어야 한다. 서울 살림살이를 제주로 옮겨 일년 아니라 앞으로 사년쯤 더 살자 했기 때문이다.

 외로움이 한계에 이른 듯한 남편이 걱정이다.

 남편이 로망하는 작은 마당이 있어야겠다. 캠핑의자를 펼쳐 책을 읽겠지. 나는 마당 가꾸기에 자신이 없으니 너무 크지 않아야 좋다. 넓직한 테라스가 있다면 더욱 좋겠다. 남쪽으로 한라산, 북쪽으로는 바다. 둘 중 하나는 확 트여야 한다. 좋은 집을 만나 남편이 제주에서 섭섭함이 없기를 바란다.


 작년하고는 다른 마음으로 집을 찾으려니 재미가 없다. 부동산 사장님들이 사모님, 사모님 하시니 부담이 되고 짐스럽다. 듣기 좋아 사모님이지 알고보면 내가 아니라 사장님들이 득을 보실게 아닌가. 서울에서 입도한지 일년이 채 안된 아줌마가 제주에는 본래없던 전세를 찾는다니 솔직히 그다지 나한테 관심도 없으시다.

 사모님 소리 듣기전에 부동산 정보에 올라온 주소로 혼자 동네를 먼저 둘러보았다. 아이들 학교 라이딩 다니기 괜찮은지, 마트는 어디인지 동선을 살피고 클린하우스는 어디 있는지도 중요했다.

 뷰가 좋다는 건 중산간 외진 곳에 있다는 뜻이다. 바다전망이 좋다면 북향이라는 것이고 구옥은 로망일 뿐 관리가 겁난다. 제주에서 집 찾을 때 생각해야할 것들을 보물찾듯 알아가고 있다. 아이들 등하교 시간에 맞춰 하루에도 서너번 들락거릴 생각을 하면 집이 아무리 좋아도 .


 학교와 유치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행복하다고 말하는 아이들. 큰 아이는   학교에서 졸업하는 것이 소원이란다. 행복한 시간을 켜켜이 쌓아 두었다가 힘들  꺼내 먹는 추억이   있다면 기꺼이. 너의 소원, 들어준다.

 친구와 리사무소 앞마당에서 놀다 들어온다해도 걱정하지 않을 집을 찾아야 한다. 리사무소 앞에서 뭐 하는 것도 없던데 정말 재밌었다며 상기된 얼굴로 집에 오는 아이가 나는 너무 좋다. 나의 어린 시절 집 앞 골목은 놀이터이자 스케치북이고 우주였다. 리사무소 앞마당은 딸아이에게 어떤 우주일까.

 이 재미있고 깨끗하고 조용하고 아담하고 아이들의 우주를 품은 마을 안에 우리집이 있을까.


 한편으론 시내로 들어가 걸어서 생활하는 도시적 삶이 아이들을 위하는 게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 여행자가 아니니 말이다.

 왜인지 소아과, 안과, 치과는 시내까지 가야 안심이고 아이들이 뭐 하나 하고 싶다하면 결국 시내다. 특히 큰 아이는 학교 외에 활동이 생겼고 나는 스케쥴에 맞춰 라이딩을 다녀야한다.

 새벽배송이니 당일배송이니 하는 건 이제 포기가 되는데 아이들 일은 그렇지가 않다.


 아니지. 내가 이럴려고 제주에 왔나.

 두부 하나 사러 차키 챙기기 귀찮아 늦도록 반짝이고 차가 막히는 대로변에 산다? 아이들은 시내를 지날 때 마다 서울 같아서 싫다고 하지않나. 나도 그렇고.

 이렇게 살려고 제주에 온 게 아니란 말이다.


 우리 가족은 이제 제주에서 일상의 루틴을 차분히 살아내야 한다. 우리의 둥지이고 쉼터이자 때로는 여행지가 되어줄 집을 찾자. 각 자의 로망을 딱 하나씩만 담아도 성공일 것 같다. 남편의 마당, 아들은 이층, 나는 서쪽으로 트여 노을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딸아이의 학교와 가까우면 더 없이 좋겠다.

 새 집을 찾아도 이사한 후에도 항상 곱씹어야지.


 이럴려고 제주에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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