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백서 읽기 00
암호화폐 백서를 읽다가 보면 굉장히 독특한 장르의 글을 읽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문제의 진단, 해결책, 사업 일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사업계획서와 유사하고, 투자유의사항, 약관, 면책조항이 들어있다는 점에서 금융상품설명서와 비슷하고, 기술적인 차별성이 적혀 있다는 점에서 특허명세서 같기도 하고,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정당의 당규와도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러한 특징 자체가 암호화폐가 갖는 다중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겠지만, 암호화폐의 문외한이 보기에는 일종의 은어들이 나열된 문서, 그래서 백서 자체가 또 다시 암호처럼 보이는 심경을 갖게 된다. 암호화폐 백서 또는 코인 백서로 검색해보면 백서 독해에 대한 글의 빈도가 다른 유형들에 비해 높다는 점에서 독해의 난해함을 증명하고 있다. 암호화폐의 내재가치가 무엇인지 모호한 상황에서, 백서에 의지해서라도 코인의 미래를 점쳐보려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Abasa라는 필자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백서의 독자를 두 부류로 한정한다. 첫 번째 부류는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하는 사람들처럼, 블록체인의 미래를 믿고 이를 실현하는 프로젝트들을 후원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 두 번째 부류는 매매차익을 노리는 투기꾼들이다. 암호화폐공개(Initial Coin Offering, ICO)에 참여할 사람은 이 두 부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백서를 써야한다는 것이 Abasa의 조언이다. 암호화폐 백서 독해와 관련된 블로그 글들을 읽어보면, 이 두 부류를 위한 해설에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국내에서는 영어로 작성된 백서를 발췌해서 번역, 게재하는 수준에서 독해가 간헐적으로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백서를 읽어볼 수는 없을까? 이 연재는 이러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떤 관점에서? 암호화폐의 백서들을 현 시점에서 인간이 상상해볼 수 있는 유토피아에 대한 서술이라는 관점에서 독해해보는 것이다. 암호화폐의 백서를 문학 장르에 비교해보면 SF 소설과 유사한 면이 있다. 어떤 특정한 세계관에서 논리적으로 추론해볼 수 있는 사회상과 인간관을 그려내는 것이 SF소설이라면, 암호화폐 백서에는 현재 존재하거나 앞으로 발전 가능한 기술적 수단을 통해서 실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경제, 사회, 정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상상도가 담겨있다. ‘19세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나 기술이상주의자들이 현 시대를 살았다면 작성했을 법한 문서가 암호화폐 백서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함께 떠오른다.
암호화폐 백서의 독자는 기획부동산 설명회에 참석하는 투자자와 같은 입장일 것이다. 독자는 저자가 설명하고 있는 가까운 미래에 올 대박이 사기인가, 아닌가를 판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시험대에 올려야 한다. 이 연재는 그러한 부담에서 벗어나 가벼운 마음으로 암호화폐 백서를 독해해볼 것을 제안한다. 암호화폐 백서들을 통해서 블록체인, VR, AR과 같은 기술들을 통해 만들어가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를 이해해보고, 그에 내재된 인간의 불안함을 읽어보는 것을 목표로 연재를 시작하고자 한다. 미래를 상상한다는 것은 언제나 불투명한 현실에 대한 불안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가 긱(Geek) 문화 내지는 사이버 문화에 대한 독해가 될 수도 있고, 대학 신입생들에게 기초 과목 중의 하나로 제시되는 비판적 읽기의 사례가 될 수도 있다. 이 연재의 최종적인 결과가 무엇으로 도출될 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암호화폐가 투기냐, 투자냐?’라는 질문에서 벗어나 기술과 사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도모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 연재의 목표가 구체적으로 도출된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글을 싣는 순서 역시 사전에 계획된 바는 없다. 비트코인 백서부터 시작해서 시간 순으로 독해해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식일 것 같으나, 블로그에 게재하는 글이라는 점에서 현 시점에서 이슈가 되는 암호화폐의 백서들을 우선으로 검토해볼 것이다. 그 전에 앞서 먼저 드는 의문은 ‘왜 백서라는 말을 쓸까?’인데 이를 연재 첫 번째 글에서 다루어 볼 것이다. 연재가 미리 계획된 순서가 없이 저자가 내키는 대로 쓰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 역시 내키는 순서대로 읽어보면 될 것 같다.